황병성 칼럼 - 6·25 전쟁과 일본의 기사회생(起死回生)

황병성 칼럼 - 6·25 전쟁과 일본의 기사회생(起死回生)

  • 철강
  • 승인 2020.06.29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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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병성 bshwang63@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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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다.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우리의 옛 속담 중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샤덴프로이데가 타인의 불행에 대한 쾌감을 나타내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한국 속담은 타인이 잘 되는 것에 대한 시기심을 나타낸다. 

실질적으로 남의 불행이 자신에게는 기쁨이 된 사건이 있었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희망도 없이 절망에 빠진 그들을 살린 것이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이 한반도와 인접한 일본에 대량의 군수 물자를 주문하면서 질식과 혼란의 수렁에 빠졌던 그들을 회생과 번영으로 이끈 기폭제가 됐다. 우리에게는 비극이었던 6·25가 그들에게는 특수가 된 것이다. 기사회생(起死回生)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동차, 섬유, 철강, 조선, 광공업, 가전 등은 이때 부흥의 기틀을 잡았다. 더불어 일자리가 늘어난 일본 국민의 생활도 급격히 윤택해졌다. 반면 6·25전쟁 아픔을 겪은 우리 국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오랫동안 해야 했다. 지금처럼 잘살게 된 것은 수많은 희생을 치른 후였다. 그들은 이웃 나라 동족상잔의 아픈 비극은 안중에도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호황에 돈 새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패전 후 희망은커녕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들이었다. 점령군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으며 무엇 하나 자신들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단숨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서두에 언급한 이유 때문이다. 남의 불행으로 내가 행복해졌다면 당연히 고마워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 하지만 일본 국민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유감스럽다. 

70년 전 발발한 6·25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남과 북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휴전 중이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하루빨리 종식해야 함에도 쉽지 않다. 그동안 우리 국격(國格)도 많이 향상됐다.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지만, 이웃 일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한다는 우리 속담처럼 늘 우리를 시기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특히 과거 식민지 시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도를 넘어서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다.

우리 대법원이 지난해 식민지 시대 강제징용에 대해 배상 판결을 내리자 그들은 수출 규제로 보복의 일본도를 휘둘렀다. 자신들보다 앞선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끊으려는 의도였다. 이로 인해 양국의 갈등 골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다행히 그들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도쿄신문이 23일 지면에 실은 ‘타격은 일본 기업’이라는 제목의 서울 특파원 칼럼에서 수출 규제에 관해 “오히려 일본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 확산이 우리 자존심을 살렸다. 짧은 기간에 끝날 줄 알았던 불매운동은 장기화 했다. 이에 닛산자동차나 유니클로와 같은 계열인 패션 브랜드 지유(GU)가 한국 철수를 결정해야만 했다. 여기에 일본으로 향하던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자 아베 정권은 큰 충격에 빠졌다. 돌이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우를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것은 우리나라다.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에 대응해 부품·소재 등의 일본 의존을 줄이고 국산화에 성공했다. 주요 3품목은 물론 다른 소재까지 일본 외 국가로부터 공급받는 것이 늘었다. 

수출 규제가 역으로 일본 기업에 악영향을 미치고 만 것이다. 타격이 클 것 같은 국내 반도체업체들은 다행히 위기를 슬기롭게 잘 넘겼다. 이러한 사실을 접하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반성할 줄 모르는 국가가 마땅한 응분의 대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에 6·25 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총 하나 들 수 없이 무장해제 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군 군화 소리를 들으며 움츠린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을 살린 것이 부끄럽지만 6·25 전쟁이었다. 누군가는 총탄에 맞아 죽을 때 누군가는 절망의 늪에서 다시 살아났다. 올해로 일본과 국교를 맺은 지 55주년이 됐다. 거리는 가깝지만, 아직 심정(心情)은 너무 먼 나라를 우리는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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