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성 칼럼 - 철강도 라면처럼…
필자는 라면을 잘 먹지 않는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가난한 자취생시절 지겹도록 먹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부터 대학 졸업까지 하루 한 끼는 먹은 것 같다. 결혼 전까지도 세 끼 중 한 끼는 먹었을 정도다. 그렇다면 최애 음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좋아서 먹은 것이 아니라 배를 채우기 위해 먹었기 때문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자취생들에게 격식 갖춘 요리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특히 1970년과 1980년대에 자취를 했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서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라면은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허기를 채워주던 음식이었다. 그래서 애증(愛憎)의 마음이 공존한다. 라면을 가까이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힘겨웠던 시절을 더는 떠올리기 싫어서이다. 눈물 젖은 빵이 아니라 눈물 젖은 라면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백번 이해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흑 역사(黑歷史)가 영원히 지우고 싶은 인생 사는 아니다. 가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차 한 잔으로 고독을 삼키다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이것이 현실의 삶에 큰 힘이 되는 것은 참으로 희한하다.
라면은 중국이 기원이다. 일본을 거쳐 1960년대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한국 최초의 라면은 ‘삼양라면’이다. 일본에서 설비를 구매하며 구걸하다시피 기술 이전을 받아 출시했다. 처음 나왔을 때는 국민 입에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가격이었다. 한 봉에 10원이나 했다. 국민 대다수가 빈곤층이었던 시절 싼 가격이 아니었다. 당시 김치찌개가 30원, 자장면이 20원이었다. 자장면도 특별한 날에만 먹었던 외식이었다. 이런 이유로 출시 이후 대중화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별 식 이미지를 벗은 것은 1970년∼1980년대 경제가 발전하고 생산량이 폭증하면서이다. 출시 20년도 되지 않아 부잣집 특식에서 서민의 대표 음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돈이 없어서 라면만 먹고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격이 수직 격하했다. 덩달아 위상도 떨어졌다. 21세기 들어서도 물가가 많이 올랐지만 라면 가격은 저렴하다고 인식한다. 부잣집이 아니면 특별한 날에만 먹었던 라면의 위상 격하는 진정한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은 계기가 되었다.
K-POP과 K-드라마 등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인기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것을 등에 업은 K-라면 성장도 눈부시다. 상상 그 이상이다. 브랜드 한 종류 매출이 1조 원을 넘긴 제품도 있다. 삼양식품의 ‘불닭복음면’ 시리즈가 그 주인공이다. 매운맛을 즐기는 해외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유튜브, 틱톡 등 SNS에서 ‘불닭 챌린지’가 유행하면서 브랜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현재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삼양식품 전체 매출의 60%를 넘어설 정도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잘 나가는 K-라면에 비해 K-철강의 위상은 초라하다. 2024년 라면 수출액은 12억 4,850만 달러로 전년(2023년) 9억 5,240만 달러에 비해 31.1%나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그 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반대로 철강은 내리막길이다. 3월에만 수출이 10.6% 감소했다. 미국의 관세 장벽을 넘어야 하는 새로운 과제도 안고 있다. 국내 철강 산업이 라면처럼 K 콘텐츠와 같은 도우미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오히려 갈수록 장애물만 늘어나고 있으니 안타깝다. 희망은 없고 절망만 마주하니 딱하기 그지없다.
철강협회에서 K-STEEL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국산 철강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이용 확대에 취지가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성과는 흡족하지 않다. 넘쳐나는 수입 철강재에 국내 시장은 속수무책이다. 줄지 않고 점점 확대되는 수입 재 점유율은 캠페인을 부끄럽게 한다. 라면과 비교된다. 국내 시장에서 국산 라면 소비는 세계 1위다. 철강업계 입장에서는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제발 국산 철강재를 써달라고 애원해 보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얼음처럼 차갑다. 가격을 우선시하는 수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최근 서울 강서구 마곡 코엑스에서 ‘2025 대한민국 라면박람회’가 열렸다. 우연히 찾은 현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7년 만에 열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K-라면의 인기를 타고 관람객들의 발길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리 국민의 라면 사랑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철강 및 비철금속산업 전시회도 11월 19일에 열린다. 2년마다 열리는 전시회다. 그동안의 성과를 평가하면 라면박람회가 또다시 부럽다. “라면이 없었더라면 100만 자취생은 다 굶어 죽었을 거다.”라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그 자리를 철강이 차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라면의 높아진 위상을 보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