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성 칼럼 - 대통령과 간담회

2025-06-18     황병성

정경유착(政經癒着)은 우리의 뼈아픈 역사다. 정치와 경제가 밀착되어 각종 부조리를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 우리나라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와 경제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것이 지나치게 밀착되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정치 세력이 경제 세력을 압도하면서 대개는 경제인이 정치인에게 예속된다. 하지만 정치가 선진화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에서는 반대 상황도 종종 발생한다. 문제는 모두 부도덕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원이라는 점이다.

자원도, 자본도, 기술도, 시설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맨땅에서 시작했던 가난하고 암울한 시대였다. 경제 개발 주체도 기업이 아니라 정부였다. 정부가 자본을 조달하고 기업을 육성하며 경제발전을 이룬 것이 대한민국 역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경유착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이에 기업은 각종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 대가로 정치자금 등 뒷돈을 상납하며 권력자에게 아부했다. 훗날 부패한 권력자가 죗값을 치르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렸지만, 아픈 흑역사는 끝내 되돌릴 수 없었다.

정경유착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 기업의 몰락이다. 서슬 퍼렇던 5공 시절 전두환 정권에 무참히 무너진 기업이 있다. 프로스펙스 신발과 용산의 랜드마크였던 국제빌딩센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재계 순위 7위였던 국제그룹의 대표 브랜드이다. 그룹은 국제상사를 모태로 동국제강그룹, 성창기업, 동명그룹, 연합철강, 태광그룹, 화승그룹 등과 함께 부울경 대표 향토기업이었다. 하지만 이 그룹이 무너진 것은 섬광처럼 빨랐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서 회생 불능 상태가 됐다.

지금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겉으로 드러난 해체 사유는 ‘과도한 부채와 무리한 확장, 현금 유동성 악화’였다. 실제로 국제그룹의 부채비율은 922%로 당시 대기업 평균(350%)의 두 배를 넘었다. 부동산 등 과잉 투자, 단기 자금 조달에 의존했던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당시 재계 10대 그룹 중 부채가 더 많은 곳도 있었고,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반론도 많았다.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정권과의 갈등이 결정타였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매정하고 야멸찬 보복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5공 시절, 일해재단·새마을운동 등 권력 핵심부의 성금 요구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 화근이었다. 타 재벌이 수십억 원을 바칠 때 5억 원(그마저도 어음)만 냈다. 대통령 주재 만찬에도 늦게 참석하거나 아예 불참해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여기에 1985년 그룹에 협조를 요청한 총선에서 부산지역이 야당 승리로 끝나자 정권은 ‘부실기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해체를 단행했다.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어음을 부도 처리하며, 그룹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됐다. 억울함에 훗날 양정모 회장이 위헌 소송을 냈고, 1993년 헌법재판소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공권력에 의한 기업 해체는 위헌”이라는 것이 판결 내용이다. 그러나 이미 계열사와 자산은 모두 타 기업에 넘어간 후였고 그룹 복원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명예뿐인 승소였다. 당시 연합철강(현 동국제강 합병)을 인수해 세계적 철강사를 꿈꾸기도 했던 노 회장의 꿈은 그렇게 부서졌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은 대가는 모질고 혹독했다. 최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이기도 하다. 13일 5대 총수 및 6단체장이 대통령실에서 간담회를 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한 급한 자리였다.

이날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의 회장은 “오늘 자리가 민관이 긴밀히 공조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를 모으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앞으로도 기업 목소리에 꾸준히 귀 기울여달라”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제일 중요한 것이 결국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라며 “그 핵심이 바로 경제고, 경제의 핵심은 바로 기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불필요한, 또 행정 편의를 위한 규제들은 과감하게 정리할 생각”이라면서도 “필요한 규제, 공정한 시장 조성을 위한 규제는 당연히 필요하지 않겠나”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 대화 내용을 보면 새로운 정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각오도 남다른 것 같다. 지금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와 “당연히 잘할 것이다.”라는 두 생각이 상충한다. 그러나 국민 마음속에는 후자의 생각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치와 경제가 정경유착과 손절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더는 국제그룹과 같은 억울한 기업이 나오지 않음을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간담회를 보며 느꼈다. 아울러 새로운 정부에 대한 기대치도 함께 올라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