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성 칼럼 - ‘왕과 사는 남자’와 철강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후 900만 명을 돌파했다. ‘천만 영화’ 등극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역사 한 줄에 섞은 상상력이 한국적 신파를 만나 900만 명 이상이 ‘단종앓이’를 하고 있다. 역사적 해석도 극명하게 갈린다. 세조는 개혁 군주가 아닌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비열한 군주로 평가받고, 단종은 삼촌에게 왕좌를 빼앗긴 비운의 왕으로 평가받는다. 이렇듯 역사는 훗날 평가가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현실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동시에 일깨운다.
무엇이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실록의 귀퉁이나 사서(史書)에 기록된 작은 흔적이 창작의 모티브가 되었다.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세조실록에 쓰인 1457년 7월(음력 세조 3년 6월) 기사 ‘…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니…’와 11월 기사(음력 10월) ‘… 노산군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 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근거해 영화를 만들었다. 여백을 파고드는 픽션은 가히 천재적 발상이다.
실록의 빈틈을 영월 지역 야사와 후대 문헌 내용으로 메우는 기발한 설정에 한국적 신파를 녹여냈다. 이것이 세대를 아우르는 ‘단종앓이’를 낳은 핵심이다. 역사를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자산으로 해 관객 접점을 넓힌 것이 주효했다. 특히 민초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엄흥도가 ‘이밥에 고깃국’을 먹기 위해 유배당한 왕의 처지를 이용하려는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은 서민의 진솔한 삶을 잘 대변한다. 짧은 역사 속 기록에 상상력을 덧입혀 만든 이 영화는 특별함이 성공의 열쇠다.
훌륭한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의미 없이 적힌 한 줄 글귀에서 욕망과 비극을 덧씌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특별함이 큰 재산이다. 이것은 무릇 영화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를 영위하는 산업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 철강산업이 그렇다. 이제 모든 철(鐵)이 돈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중국산 씨구려 범용 철강재가 쏟아지면서 가격 경쟁력은 쫓아갈 수 없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수요마저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 철강이 숙명처럼 걸어야 하는 길은 특별함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지난해 국내 주요 철강기업인 포스코·현대제철·세아제강 매출이 모두 줄었다. 건설 경기 침체와 중국산 저가 철강재 유입이 최대 원인이다. 이에 따른 내수 부진, 글로벌 수요 둔화와 관세로 수출 부담이 높아지면서 구조적 불황기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범용 철강재는 가격 경쟁 영역에서 벗어나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산업이 됐다. 국내 철강업계가 이것을 빠르게 인지하고 철근·후판 등 대신 방산·항공우주·에너지용 ‘특수강’에 눈을 돌린 것은 천만다행이다. 미국 중심 조선·방산 수요가 확대에 맞춘 적절한 대응이다.
철강업계가 꺼낸 카드는 기술력이다. 가격 대신 기술 문턱을 높인 것이 특수강이다. 이것을 해법으로 삼고 있다. 더욱이 특수강은 기술 진입 장벽이 높은 만큼, 이윤도 높다. 실제 범용 철강재 영업이익률은 1∼3%에 그친다. 반면 특수강은 두 자릿수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고부가 사업이다. 공신력 있는 기술 인증을 통해 신뢰까지 확보하면서 순풍에 돛을 달았다. 물론 모든 철강사가 특수강에 집중할 수는 없다. 연구개발 및 인증 과정에서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희생도 따른다는 얘기다.
국내 제조업 전반이 규모의 경쟁에서 선별 생존 국면으로 진입했다. 각기 다른 특별한 강점을 살려야 생존을 보장받는다. ‘선택과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실록의 귀퉁이에 기록된 하찮은 흔적이 창작의 보고(寶庫)가 되었듯이 눈을 씻고 찾아보면 길은 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것을 등한시하는 기업이 많다. 쉽게 포기하고 구조조정을 우선하는 기업에는 미래가 없음을 수시로 목도(目睹)한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스스로가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내 철강기업들이 무언가를 저지르고자 애쓰고 있다. 그렇지 않은 기업은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없고, 생존도 보장받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