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조선업 호황의 역설, 후판 산업의 ‘초격차’ 생존 전략
국내 조선업계가 3년 치 이상 수주 잔량을 확보하며 유례없는 호황기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철강업계의 표정은 복잡하다. ‘배가 많이 팔리면 철판도 많이 팔린다’는 과거의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조선업 호황의 역설’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조선용 후판 수요는 연간 330만~350만 톤 수준에서 정체될 것으로 보인다. 수주량은 늘었지만, 실제 후판 투입량은 과거보다 줄어드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주력 선종이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나 원유운반선에서 LNG 운반선으로 옮겨가면서, 선박 한 척당 후판 사용량은 30~50%가량 감소했다.
여기에 ‘메이드 인 차이나’의 공세는 더는 ‘저가 물량’에만 머물지 않는다. 최근 중국 조선소의 모습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닌 거대한 ‘선박 공장’에 가깝다. 중국은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수십 척의 배를 동시에 건조하는 라인 생산 체계를 구축했다. 여기에 정부 차원의 강력한 금융 패키지와 압도적인 납기 경쟁력, 과거의 편견을 깨뜨리는 높은 품질까지 더해 글로벌 선사들을 강력하게 유인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후판을 잘 만드는 회사”로는 절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임을 보여준다. 그러면 한국 후판 제조사들은 어떤 중장기 전략을 세워야 할까?
우선 ‘범용재’에서 ‘특수재’로의 포트폴리오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일반 후판 시장에서 가격으로 승부하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현재까진 후판 물량·가격은 중국 우위, 고부가·기술·신뢰성은 한국 우위의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글로벌 시장 구조에 더해 IMO 환경 규제 강화에 따른 친환경 선박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 LNG, 암모니아, 수소 추진선에 필수적인 극저온용 고망간강이나 니켈강 같은 고부가 제품에서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중국이 따라오지 못하는 ‘하이엔드 강재’만이 수익성을 보전할 유일한 탈출구다.
조선사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넘어선 ‘공급망 통합’도 중요하다. 최근 국내 조선사들이 중국산 완성형 블록 도입을 늘리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산 후판 수요를 잠식하는 부메랑이 된다. 철강사는 단순 판매를 넘어 조선사의 공정 효율을 높여줄 수 있는 가공 서비스나 물류 솔루션을 함께 제공함으로써 국내 조선소 내 국산 강재 점유율을 방어해야 한다. 조선사와의 관계를 ‘거래’에서 ‘파트너십’으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이와 함께 반덤핑 등 보호무역 조치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되, 자생적인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산 후판 반덤핑 관세 부과는 단기 방어막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스마트 팩토리 도입을 통한 생산 단가 절감과 친환경 저탄소 철강 생산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미래 규제 환경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조선업의 패러다임이 ‘양’에서 ‘질’로 바뀌었듯, 후판 산업도 ‘톤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으로 조선용 후판 시장은 “누가 더 많이”보다 “누가 어떤 급(級)의 후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느냐”는 싸움에 가깝다. 중국의 추격이 거센 지금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가치 중심의 질적 성장’을 도모할 골든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