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AI 데이터센터 시대…“ESS 철강 공급망 국산화 속도 내야”
배터리는 국산, 인클로저는 해외 생산…철강 공급망 경쟁력 확보 과제 부상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정작 이를 구성하는 핵심 철강 소재는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AI 인프라 확대에 따라 새로운 철강 수요가 만들어지고 있음에도 국내 철강업계는 이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배터리 셀 경쟁력을 넘어 ESS 인클로저(Enclosure)와 철강 소재까지 포함한 공급망 경쟁력 확보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철강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공급하는 ESS 인클로저 상당수는 베트남 등 해외 생산거점에서 제작되고 있다. 인클로저 제작에 사용되는 열연강판과 형강 등 철강재도 중국산이나 현지산 소재를 사용하는 사례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원가를 낮추기 위해 해외에서 구조물을 제작하는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AI 시대 새롭게 창출되는 철강 수요 역시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격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라며 “다만 미국을 중심으로 공급망 재편과 원산지 관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핵심 구조물까지 해외 소재 의존도가 높을 경우 향후 통상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질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 글로벌 ESS 시장 확대…철강 수요도 증가
ESS는 배터리 산업으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철강 소비 산업의 성격도 강하다. 배터리 셀을 보호하는 인클로저를 비롯해 내부 랙(Rack), 프레임(Frame), 베이스 구조물 등 대부분의 핵심 부품이 철강 소재를 기반으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투자가 늘어날수록 ESS 설치가 확대되고, 이에 철강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ESS 시장은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확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급증하면서 대용량 ESS 구축이 필수 설비로 자리 잡았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 확대에 따른 계통 안정화 수요까지 더해지면서 시장 성장세도 한층 가팔라지고 있다.
BNEF와 SNE리서치 등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시장은 2030년 전후 누적 설치용량 1,000~1,400GWh 수준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0년대 중반과 비교하면 2~3배 이상 성장하는 규모다.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에 대응해 글로벌 배터리 업체들이 ESS 생산을 확대하고 있는 데다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이어지면서 관련 수주 경쟁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철강업계도 ESS를 새로운 수요처로 주목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형 ESS 인클로저 1기당 약 10톤 안팎의 열연강판과 형강, 냉연강판 등이 사용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한 곳에 수십에서 수백 기의 ESS가 설치되는 점을 감안하면 프로젝트 하나만으로도 수천 톤 규모의 철강재가 투입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용 ESS는 일반 산업용 설비보다 높은 수준의 소재 성능을 요구한다. 장기간 옥외 설치를 전제로 하는 만큼 저온 충격인성과 내식성, 고강도, 용접성은 물론 화재 안전성까지 확보해야 한다. 북미 북부나 유럽 등 혹한 지역에 설치되는 프로젝트도 적지 않아 저온 취성에 대한 대응 능력 역시 제품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로 꼽힌다.
◇ 해외 생산 고착…국산 철강은 '제자리'
해외 중심의 공급망이 형성된 배경에는 가격 경쟁력이 있다. ESS 인클로저는 배터리 셀과 달리 철강 가공 비중이 높은 제품이다. 배터리 업체들은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베트남 등 해외 생산거점을 활용하고 있으며, 인클로저 제작에 필요한 열연강판과 형강 등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실제 국내 ESS 인클로저 제조업체 상당수는 국내 철강사보다 중국산이나 베트남산 철강재를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에서 소재를 구매하는 편이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공급망은 수년간 이어지면서 사실상 산업 구조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업계 설명이다.
문제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ESS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철강 수요는 국내가 아닌 해외 철강업체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글로벌 ESS 시장 점유율이 확대될수록 인클로저용 철강 수요도 함께 늘어나지만, 현재와 같은 공급 구조가 유지된다면 국내 철강업계가 얻는 직접적인 수혜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셀은 국내 기업이 공급하지만 이를 감싸는 인클로저는 해외에서 생산하고 철강재 역시 현지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AI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도 철강 수요는 중국과 베트남으로 흘러가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ESS 공급망 국산화…공공시장 역할 커진다
가격만 놓고 보면 해외 조달이 유리할 수 있지만 공급망을 둘러싼 환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통해 중국산 배터리와 핵심 부품에 대한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현행 제도가 ESS 인클로저용 철강재를 직접 규제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재 원산지 관리가 구조물까지 확대될 가능성에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북미 시장은 ESS 수요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투자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도 북미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배터리 셀뿐 아니라 인클로저와 철강 소재까지 포함한 공급망 경쟁력이 향후 수주 경쟁의 새로운 변수로 부상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AI 데이터센터용 ESS는 혹한과 폭염 등 다양한 기후 환경에서 장기간 운영되는 만큼 소재의 신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한 가격 경쟁보다 장기적인 품질과 공급 안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국내 ESS 시장만큼은 공급망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확충, RE100 확산 등을 추진하면서 ESS 보급도 확대하고 있다.
반면 인클로저 생산과 철강재 조달이 해외 중심으로 이뤄질 경우 국내 제조업으로 이어지는 성장 효과는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ESS 사업부터 국내 생산 인클로저와 KS 인증 철강재 활용을 유도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민간 시장까지 일률적으로 규제하기보다는 공공 조달시장을 중심으로 국산 소재 활용 기반을 마련해 국내 제조 생태계를 육성하자는 취지다.
업계 관계자는 "ESS는 AI 시대를 대표하는 전력 인프라이지만 이를 구성하는 철강 공급망은 아직 해외 의존도가 높다"며 "배터리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만큼 소재와 구조물까지 포함한 공급망 경쟁력 확보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가 추진하는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피지컬 AI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배터리와 완성품 산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강과 부품·소재 산업으로 이어질 때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도 함께 높아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