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성 칼럼] 입추(立秋) 그리고 말복(末伏)
입추(立秋)가 먼저일까, 말복(末伏)이 먼저일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날짜에 따라 순서가 미세하게 바뀌지만, 2026년은 입추(8월 7일)가 지난 일주일 뒤에 말복(8월 14일)이 찾아왔다. 절기상 입추는 기온의 가을이 아니다. 태양의 위치가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는 말이 있다. 입추 무렵에는 벼가 햇살을 받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는 뜻이다. 얼마나 빠르게 자라나는지 소리에 민감한 개가 깜짝 놀라 짖을 정도라는 농가 속담이다.
이 시기의 강렬한 햇빛과 더위가 농작물 소출에는 필수적임을 뜻한다. ‘입추에 비가 오면 소가 춤을 추고, 맑으면 농사에 이롭다’라는 말도 있다. 입추 무렵에 일조량이 풍부하고 날씨가 맑아야 곡식이 단단하고 실해진다는 의미다. 입추에 장대비가 오래 내리면 벼가 제대로 익지 못해 수확이 줄어든다고 믿었다. 이에 조상들은 입추 당일의 기상 상태를 보고 한 해 농사의 풍년과 기근을 점쳤다. 입추가 지나도 약 2∼3주 동안은 ‘잔물더위’가 지속된다. 지표면에 축적된 한여름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다.
말복(末伏)이 자리하는 것도 이 시기다.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는 신호다. 복날은 음력 절기가 아닌 24 절기와 천간이 결합되어 정해진 세시 풍속이다. 여름철 무더운 시기를 알리는 삼복이 있다. 초복, 중복, 말복으로 나뉘며 예로부터 더위에 지친 몸의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다양한 보양식을 먹는 풍습이 이어져 왔다. ‘복(伏)’이라는 글자는 ‘엎드릴 복’ 자를 사용한다. 이는 너무 강한 더위 때문에 사람이 몸을 낮추어 엎드릴 정도라는 얘기다. 이 시기에는 집에서 키우던 닭이나 개들이 주로 난을 많이 당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시기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며 건강하게 보내는 지혜를 실천해 왔다. 지금도 이 풍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보신탕보다 삼계탕이 식탁 위에 많이 오른다. 특히 2026년 7월 이후부터 개 도살행위가 금지되면서 개는 살아났고 닭은 더 죽게 생겼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전국의 개 사육 농장이 1,537개소로 나타났다. 이 농장 개들이 복날을 잘 이겨내고 살아났을지 궁금하다. 유년 시절 돌어다니는 개장수 소리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던 우리 집 ‘워리’가 생각난다. 그 개의 제삿날도 말복이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복날이 되면 관원들에게 얼음을 하사했다고 한다. 여름에 얼음이 귀했으니 귀중한 하사품이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삼계탕을 먹거나 아니면 시원한 과일 화채, 아이스 아메리카노, 빙수, 수박 등 더위를 식히는 디저트 풍습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생활방식과 식문화의 변화에 맞춰 풍습도 한층 다채롭고 편리하게 바뀌고 있다. 실제로 복날이 되면 배달 앱에서는 치킨 주문이 급증한다고 한다. 30년 후에는 이러한 문화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부채가 에어컨으로 바뀌었듯이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우리 업계야말로 여름이 되면 곤혹스럽다. 불을 취급하는 것이 업이어서 고충이 크다. 한여름 열(熱)과의 사투는 처절하기 그지없다. 1,500℃의 용광로 근처는 지옥 불이다. ‘폭염 경보’ 및 ‘폭염 주의보’의 발령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회사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무더위를 이겨내려고 애쓴다. 다행히 말복이 지나면서 아침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자연의 섭리(攝理)가 이처럼 반가운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맘때는 무더위와 싸움에서 이겨낸 우리 업계 종사자들이 자랑스럽다.
여전히 푹푹 찌는 여름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지만 자연은 이미 바람의 미세한 결을 바꾸며 가을의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 더위에 마냥 짜증을 내기보다 내 몸속의 세포들도 곡식처럼 알차게 익어가고 있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자연의 섭리가 선사하는 정직한 순환이 지친 일상에 맑고 산뜻한 생기를 되찾아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흔히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내 마음대로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맛은 계절이 내 몸에 보내는 신호이다. 몸은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리고, 살아남기 위해 영양을 스스로 찾는다. 그것이 예로부터 복날이면 먹었던 보신 음식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대자연의 영리한 설계에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가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