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창립 50주년 - 특집) (1) 포스코의 창업이념 ‘제철보국(製鐵報國)’과 ‘우향우 정신’ 그리고 영일만 신화

(포스코 창립 50주년 - 특집) (1) 포스코의 창업이념 ‘제철보국(製鐵報國)’과 ‘우향우 정신’ 그리고 영일만 신화

  • 철강
  • 승인 2018.04.0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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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김도연 kimdy@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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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은 포스코(회장 권오준)는 신성장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100주년인 2068년 매출 500조원, 영업이익 70조원의 회사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2018년 올해가 미래를 시작하는 원년이다. 포스코 권오준 회장은 포스코에게 2018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이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50년의 포스코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라며 올해가 그 원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스코의 탄생과 성장, 발전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사에서 포스코는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아무도 성공할 것으로 확신하지 못했던 탄생 초기에서부터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성장하기까지. 50년간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포스코는 현재 미래의 50년을 위해 또 다시 도약을 시작하고 있다. 철강본원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100년 기업으로의 성장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열정과 집념, 희생 등으로 집약되는 포스코의 지난 50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고 포스코가 제시한 미래 비전 등에 대해 4회에 걸쳐 알아봤다. <편집자 주>
 

  ■ 無에서 有를 창조한 영일만 신화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자원마저 없어 일관제철소의 건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과 같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現 포스코) 사장을 비롯한 포스코맨들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했고 잇달아 광양만에 최신예의 세계 최대 제철소 건설에 성공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일관제철소 건설(1961~1970) =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 자원마저 없는 無의 상태에서 일관제철소의 건설은 꿈 그 자체였다. 자금 부족, 정국 혼란과 국내 여론의 반대 등으로 다섯 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결국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1961년부터다. 당시 정부는 조국 근대화를 통해 빈곤에서 탈피하고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철강산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최우선 역점사업으로 종합제철건설을 구상했다.

  국내외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낸 종합제철소 건설 = 1967년 6월 정부는 조강 연산 300만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지역으로 포항을 건설 예정지로 결정했다.

포항제철종합주식회사 창립 현판식
포항제철종합주식회사 창립 현판식

 1968년 4월 1일 종합제철 건설사업은 여전히 재원확보 계획이 불투명한 상태였지만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39명의 임직원(창설요원은 조기퇴직자 5명을 제외한 34명)들로 창립식을 갖고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現 포스코)’를 공식 출범했다.

  민족의 염원인 종합제철소 건설은 시작의 닻을 올리긴 했으나 국내외의 온갖 회의적인 시각과 반대 여론, 주요 기관들의 잇따른 타당성 부인 등으로 커다란 장벽에 부딪혔다. 일부 국내 언론은 제철소 건설사업은 외자 부담이 크고 생산비가 높기 때문에 수입강재를 쓰는 것보다 국민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되고, 결국 종합제철은 거대한 부실 기업이 될 것이라 보도하기도 했다. 또 농촌 출신 국회의원의 80%도 농수산 부문 개발 용도로 사용될 자금이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되면 자신들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USAID(미국국제개발처)도‘포항종합제철사업의 확정 재무계획에 대한 분석’에서 IBRD의 평가와 맥을 같이 하는 부정적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으로 1966년 11월부터 관료들이 주도해 온 KISA를 통한 자금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69년 1월말 박태준 사장은 한일국교정상화 협상단 참가 당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가 남아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고 대일청구권의 일부를 종합제철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구상을 하게 됐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일본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 내 1970년 착공에 이어 1973년 7월 3일 성공적으로 일관 제철소를 준공함으로써 국가 산업 육성의 버팀목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 포스코의 창업이념 ‘제철보국(製鐵報國)’과 ‘우향우 정신’

  포스코의 창업자 故 박태준 명예회장은 ‘좋은 철로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으로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황무지 같은 작은 어촌 포항에 제철소를 만들고 포스코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철강사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포스코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철강 제품을 생산하면서 자동차, 조선 등 국내 제조업은 양질의 철강재를 싸게 공급받게 되면서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품질개선과 동시에 원가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자동차 생산 대수는 400만대에 육박하며 세계 5위권의 자동차 수출 국가로 부상하게 됐고 조선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게 됐다. 또 건설, 기계 등의 산업 역시 세계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포스코의 존재에서 비롯됐다.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박태준 사장은 밤낮으로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직원은 물론 수주업체와 건설업체 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특히 선조들의 피 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며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이러한 박태준 사장의 의지는 모든 요원들에게 큰 울림을 주어 현장에서는 ‘우향우 정신’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됐으며 현재까지도 포스코 사풍을 형성하는 원류가 됐다.


  ■ 고난과 역경을 뚫고 이룬 종합제철소 건설(1970~1981)

포항1기 착공식에서 착공버튼을누르고 있는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열 부총리 (1970.4.1)
착공버튼을누르고 있는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열 부총리
(1970.4.1)

  포항제철소는 1970년 4월 1일 영일만에서 건설의 첫 삽을 뜨고 4번의 확장사업 끝에 1973년 5월 조강 연산 910만톤 체제의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은 건국이래 최대 규모 단일투자라는 점과 철강재 자급 촉진과 국제수지 개선 및 고용증대, 자주국방 능력 강화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포항제철은 창립 2주년을 맞은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현장에서 조강 연산 103만톤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종합착공식을 거행하고 대역정의 첫 발을 내딛었다.

  제철소 건설은 원칙적으로 제품이 생산되는 순서에 따라 제선-제강-압연공장 순으로 건설하는 포워드(Forward)방식을 택하나 포항제철소는 제품생산공장부터 건설하는 백워드(Backward)방식을 택했다. 이는 건설공정이 짧은 압연 및 제강공장을 먼저 완성해, 수입한 반제품으로 완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생기는 이윤을 나머지 공장 건설에 투자하면서 제철소를 완성한다는 계획 때문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밤낮으로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직원은 물론 수주업체와 건설업체 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특히 선조들의 피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며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 이러한 박태준 사장의 의지는 모든 요원들에게 큰 울림을 주어 현장에서는 ‘우향우 정신’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됐으며 현재까지도 포스코 기업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ㆍ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들이 공사현장에 나가 공사기간을 성공적으로 만회했으며 이같은 정신과 노력으로 준공을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길 수 있었다.

  포스코는 포항제철 1기 건설 3년 2개월 만에 우리민족 최초의 현대식 대형 용광로를 준공하고 첫 쇳물을 생산하는 역사적인 감격의 순간을 맞이했다.

감격의 첫 출선 (1973년 6월 9일)
감격의 첫 출선 (1973년 6월 9일)

  화입 후 21시간 만인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용광로에서 쇳물이 터져나왔다. 고로 제2주상을 가득 메우고 쇳물이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태준 사장과 건설요원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한국철강협회는 2000년에 이 날을 ‘철의 날’로 지정했다.

  이후 1973년 7월 3일 포항1기 설비 종합준공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260만톤 체제의 2기 설비를 준공한 1976년 5월 이후부터는 한국의 철강생산 능력이 사상 최초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박태준 사장은 불량시공만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했고, 포항 3기가 건설 중이던 1977년 8월 1일 발전송풍설비 공사현장을 돌아보던 중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의 불량을 발견하고 80%가 진행된 구조물을 폭파함으로써, 완벽시공의 의지를 임직원들은 물론 참가기업들에게까지 전파해 오늘날 포스코 설비 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포항제철은 1970년 4월 포항 1기 설비착공 이래 자립경제 달성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설비 건설시 마다 국산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포항 1기는 일반 강재, 소형 구조물 등 소재류부터 포항 2기 때는 철골, 강관 및 대형 기중기 등으로 확대했으며 전체 기자재 중 국산화 기기의 비중도 1기 12.5%, 2기 15.5%, 3기 22.6%, 4기 35.1%까지 확대해 국내 관련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 단일제철소로서 세계 최대 규모 광양제철소(1981~1992)

  1973년 포항제철소 1기 설비의 성공적인 준공식후 정부는 1980년대 국내 철강수요를 약 1,200~1,300만 톤으로 예상하고 포항제철의 1ㆍ2차 확장공사와는 별도로 연산 1,000만 톤 규모의 제2종합제철공장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제4차 중동전으로 인한 석유파동, 1974년말 철강경기 침체를 겪고 1975년에 이를 일단 백지화 했다가 1977년에 제2종합제철 건설을 다시 추진했다. 1978년 10월 제2제철 실수요자로 포스코가 확정되면서 광양에 4기에 걸친 총 1,140만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립이 시작됐다.

  당시 포스코가 선정된 주된 이유로는 포항제철소와 1사 2소 체제를 유지해 경영합리화를 가져올 수 있고 이를 토대로 국제경쟁력을 지닌 선진철강사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수 있다는 점과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재는 국내 산업발전에 있어서 전후방 효과가 지대해 공익성이 보되어야 한다는 점, 포항제철소를 성공적으로 완공하면서 축적한 건설능력 큰 요소로 작용했다

  제 2종합제철사업은 사업자 선정과 더불어 입지 선정에도 논란이 많았다. 경북 영해를 비롯해 아산만 등 여러 후보지가 검토됐으나 1981년 11월 광양만의 바다를 메워 제철소를 건설하자는 포스코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오늘날 광양제철소가 탄생하게 됐다.

  1981년 광양제철소 건설 추진 당시 포스코는 850만 톤 규모 포항4기 체제를 가동했고, 세계 철강업계의 흐름과는 달리 100%를 상회하는 가동률과 흑자경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1981년 포스코가 광양제철소 건설을 발표하자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반발 움직임을 표출했다. 특히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해 설비 공급과 기술협력을 제공해 온 일본 철강업계로서는 더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양국 철강 교역사상 처음으로 물량 면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자, 일본 철강업계는 큰 충격을 받아 1981년을 ‘부메랑 원년’이라고 명명하는 등 견제심리가 극에 달했으며, 신일본제철은 제철소 설비 설계에 필수 사항인 광양제철소 기본기술계획(MEP: Master Engineering Plan) 검토요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포스코는 일본의 협력 없이 광양제철소를 계획대로 건설한다는 계획하에 설비도입선을 유럽과 미국으로 전환하기 위해 설비제작업체를 잇따라 방문하며 한국의 철강수급 상황과 광양제철소 건설 타당성을 설명하고 협력을 얻어냈다.

  이에 일본 철강업계도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광양제철소 건설에 대해 간접 협력 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하겠다고 결정하면서 광양제철소 설비 공급에 일본 설비제작업체들도 참여하게 됐으며, 포스코는 미국, 유럽과 일본 업체들의 경쟁입찰을 유도해 당시 세계 최신예 설비를 저렴한 가격과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바다 위의 제철소 광양제철소 = 광양제철소는 국내 최초로 바다 위에 건설하는 공장인 만큼 공장 배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고, 단계별 확장을 감안해 부지를 확정했다.  제철소 부지 면적은 총 1,488만㎡(약 450만 평)였는데, 공장부지가 1,015만㎡, 준설매립 시 불량토를 저장한 수토장이 263만㎡, 지원시설 기지 및 주택단지가 210만㎡였다.

광양제철소 1고로 모습
광양제철소 1고로 모습

  포스코는 1985년 3월 5일 광양 1기 설비공사를 착공했다. 조강 연산 270만톤 규모에 제품구성은 향후 대량 공급부족이 예상되는 열연제품으로 전량 확정했다. 고생산성 추구, 자원절약, 품질향상, 공해방지를 위하여 최신설비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1987년 4월 24일 1고로 화입식후 시험조업 과정을 거쳐 같은해 5월 7일 종합준공했다.

  광양제철소 걸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철강업과 중공업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건설, 조선, 자동차, 기계, 전기, 전자산업 등 철강 다소비 산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이들 산업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철강재의 안정적인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이 무렵 우리나라는 중공업 발전에 주력함에 따라 공업구조가 고도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판재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제철설비확장을 통하여 국내 전후방 관련 산업의 발전을 촉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포스코는 광양제철소 2기(1986. 9.30 ~ 1988. 7.12), 3기(1988.11.1 ~ 1990. 12.4)에 이어 1992년 10월 2일 광양제철소 4기 설비(착공 1991. 1.5)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1968년 창업 이래 4반세기에 걸친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를 마무리지었다.

4반세기 건설 대역사 종합준공식 (1992.10.2)
4반세기 건설 대역사 종합준공식 (1992.10.2)

  포스코는 광양 4기설비 준공으로 회사는 조강생산 1,140만 톤 체제의 광양제철소와 940만 톤 체제의 포항제철소를 합쳐 총 2,080만 톤의 조강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어 세계 3위의 대형 철강회사로 부상했다.

  광양제철소는 단위 제철소별 생산 규모에서 1982년부터 9년간 세계 1위를 고수해 온 포항제철소를 추월하여 최적의 생산 규모를 갖춘 세계 제일의 단일 제철소로 부상했다.

 

 

 

 

 

 

  ■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 포스코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경제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의 상징인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목적으로 철강산업 육성을 최우선 추진했다.

  이는 결국 조선, 자동차, 전자, 기계 등 제조업 및 건설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이런 철강산업의 부흥을 주도한 중심이 포스코였다.

  포스코는 조업 개시 이래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 가전, 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수 우선정책을 통해 가격이 저렴하고 품질이 높은 철강재를 생산, 공급함으로써 1980년대이후 자동차, 조선, 전자 등 중화학 공업의 발전이 가능하게 됐다. 포스코가 공급하는 제품의 가격 및 품질 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장한 수요산업은 철강산업의 든든한 수요기반이 됐고 이는 한국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안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포스코의 첫 쇳물이 나온 1973년에 국내 조선 건조량은 1만2,000톤, 자동차 생산은 2만5,000대에 불과했다. 이후 1980년에 포스코의 조강생산량은 590만톤, 조선건조량은 65만톤, 자동차 생산은 12만대로 급격히 증가했고 2017년 기준으로는 포스코의 조강생산량은 3,720만톤, 조선 건조량은 2,350만톤, 국내 자동차 생산은 411만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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