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가슴 아팠던 추억 … 우리 어머니!

추석, 가슴 아팠던 추억 … 우리 어머니!

  • 컬럼(기고)
  • 승인 2019.09.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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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병성 bshwang@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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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미디어 디자인센터장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또다시 민족대이동이 시작된다. 요즘은 세태도 많이 바뀌었다. 자식들을 보기 위해 역 귀성하는 부모님이 있는가 하면, 외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가난했던 유년의 추석을 생각하면 아린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특히 한 죽마고우(竹馬故友)의 추석 가정 풍경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린 친구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누나가 객지로 떠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동구 밖으로 나가 누나를 기다렸다. 산골은 집집이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가난으로 끼니 해결도 어려웠던 산골에서는 누나와 누이들이 공부를 계속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객지로 가야 했다.

친구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방울방울 눈물 흘리며 동구 밖을 돌아가던 누나의 뒷모습이 내내 가슴 속에서 아팠다. 그래서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누나를 장승처럼 서서 기다렸다. 친구 어머니는 남편을 원망하며 “그 어린 것을…” 하고 말을 잇지 못하시고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많았다. 그 후 누나는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한 해를 넘긴 후에야 추석이 되어 누나는 고향으로 왔다. 가냘픈 몸에서 묻어나는 고생의 흔적에 식구들은 가슴이 아팠다. 딸의 모습에 자책하며 친구 아버지는 말없이 막걸리만 들이켰다. 식모살이하며 한푼 두푼 모아 사 온 가족들의 선물을 풀어놓자 어머니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것이 남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던 것이다.

괜찮다는 누나의 말이 위로되기는커녕 오히려 애틋함으로 응어리졌다. 지독한 가난과 싸움으로 힘겨웠던 유년은 그렇게 세월을 더해 덧없이 흘렀다. 누나가 식모살이를 해 번 돈으로 친구는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교까지 갔다.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다며 거친 땅을 일구시던 친구의 부모님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촌로(村老)가 되셨다.

세월의 강은 애틋한 상처를 어루만지며 쉼 없이 흘렀다. 산골 마을 아이들도 장성하여 하나둘씩 고향을 떠났고, 가난하였기에 더욱더 슬펐던 그 날의 일들은 추억이 되었다. 고향은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한 흑백사진 속의 이야기처럼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남았다.

종일 자맥질에 허기졌던 개울가에서 미꾸라지, 피라미를 잡아 구워 먹던 친구들은 없다. 뒷산 승냥이 울음소리에 가슴 졸이며 함께 밤마실을 가던 친구들도 없다. 고향은 아이들 소리로 떠들썩했던 옛날과 달리 폐허 속 마을처럼 적막했다. 여기저기 묻혀 있는 추억을 깨우면 순진한 꿈을 살찌우던 유년의 친구들이 금방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그리움만 더할 뿐 고향은 타향인 듯 낯설었다. 동산에 오르면 뻐꾸기만 제 홀로 서럽게 운다. 동구 밖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들꽃도 자취를 감추었다. 송홧가루 날리던 이른 봄, 들꽃 향기에 취해 아득히 정신을 놓았던 옛날이 그립다. 깊어가는 밤 오두막에서 아련히 들려오던 다듬이 소리, 이웃집 사랑방에서 가마니 짜는 소리, 밤새 끊어질 듯 이어지던 부엉이 울음소리가 구슬펐던 고향의 밤이 그립다.

추석이 되면 동구 밖에는 누나를 기다리던 친구 대신 어머니가 객지로 간 자식들을 기다리신다. 고왔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무서리처럼 내렸고, 힘겨운 삶의 무게로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오롯이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사신 어머니는 자식 걱정을 놓으실줄 모르신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동구 밖을 숨 가쁘게 달려 나오시는 이유다.

친구들은 떠나고 없지만, 오매불망 자식들을 기다리시는 어머님이 계시기에 고향을 향하는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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