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부터 고향을 떠났다. 그 이후 자주 꿈속에서 유년의 고향 풍경 속 나를 만났다. 종일 뛰어놀았던 산과 들, 마을 초입 서낭당 아름드리나무는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있다. 조무래기 아이들과 멱을 감던 수정처럼 맑은 천(川)은 여름이 되면 천혜의 놀이터였다. 그 많은 추억이 묻혀있는 고향은 명절 때만 찾는 곳이 됐다. 지금도 아버지가 뒷산에 누워 계시고, 노모가 객지로 떠난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자기가 태어났던 굴을 향해 둔다는 말이다.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거나 혹은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 금수(禽獸)조차 이러한데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특히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하고 남는다. 이처럼 고향은 늘 가고 싶은 곳이고 그리움의 대상이다. 마음속 애잔함이다.
최근 전화와 카톡을 이처럼 많이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필자를 아는 사람은 거의 다 고향 안부를 물어왔다. 울진지역 산불을 두고 하는 걱정이었다. 필자의 고향은 울진이 맞지만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다행히 화마(火魔)는 피할 수 있었다. 100% 진화 소식은 비가 온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산불은 무려 213시간 40분 9일 만에 잡혔다. 9일 동안 고향 사람들의 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너무 안타까웠고 처한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슬펐다.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았던 고향에 사는 사촌 누이에게 전화를 했다. 북면으로 시집을 갔던 누이도 이재민이었다. 하지만 나의 위로에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둡지만 않았다. 긍정적인 성격 탓도 있었지만 각지에서 쏟아지는 온정이 위안이 된다고 했다. 산불이 난 것을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절망에 빠진 이재민들을 위해 온정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이의 집은 비교적 피해가 적은 편이라 피해가 많은 곳을 찾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데는 우리 업체도 뒤지지 않았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선뜻 성금을 내놓기란 쉽지 않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스코 그룹이 20억 원, 고려아연 5억 원, LS그룹 3억 원을 내놓았다. 이 성금은 실의에 빠진 이재민들에게 희망을 싹 틔우는 소중한 씨앗이 될 것이다. 좌절하지 않게 하는 원천이 될 것이다. 필자와 같은 고향을 떠난 마음속 이재민들에게도 큰 위안이 됨은 물론이다. 그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는것은 도움받은 자의 도리일 것이다.
“모든 것이 타버렸지만 선행은 불타지 않았다”라고 한 매체가 제목을 뽑았다. 산불로 잿더미가 된 현장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이재민과 산불 진화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은 눈물겨웠다. 소방관들을 위해 매일 도시락 100인분을 준비한 식당이 있는가 하면 생업을 포기하고 음식·배달 봉사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충남 보령에 사는 한 농부는 “이재민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드렸으면 좋겠다”라며 농사지은 쌀 12포대를 직접 싣고 와 화제가 됐다. 이 농부는 본인도 수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 이재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또 출근 전 물품을 기부하러 왔다며 전북 군산에서 밤새 운전해 새벽에 다녀간 익명의 기부자도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고사리 손으로 용돈을 모아 성금으로 혹은 진화 현장에서 필요한 핫팩과 손 편지 등을 보내오기도 했다. 7천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도 이재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이들 봉사자 대다수는 고령인 이재민들의 손발이 되어 식사와 생활을 도왔고, 병원 진료 등을 도왔다고 한다.
누이를 통해 이런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정이 넘쳐난다. 봄이 되면 잿더미로 변한 산불현장에서 파릇하게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그것이 곧 희망이다. 이재민들도 아픔을 툭툭 털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갖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산불 이재민 돕기를 마다하지 않은 우리 업체가 한없이 자랑스럽다. 이재민은 물론 그곳이 고향인 사람들도 두고두고 그 감사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