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생활의 애환과 함께 해온 동전 10원의 가치가 땅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정도가 됐다. 과거 탁구공만 한 눈깔사탕 1개가 10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로 출시된 삼양라면과 그때 시내버스 요금이 10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0원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물건을 사고파는 데 지급하는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화폐의 가치를 상실한 10원에 대해 연민과 아쉬움이 크다. 애용했던 과거를 잊지 못해서이다.
10원짜리 동전은 고가(高價)의 구리(銅)와 니켈로 만든다. 이에 돈의 가치보다 소재의 가치가 더 많이 나간다. 10원을 만드는데 77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돈 만드는 돈이 더 들어가는 경우이다. 이 10원 동전이 화폐의 가치를 상실하면서 생활의 지혜 수단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냄새 잡는 탈취제로 냉장고와 신발밑창에 깔고, 전자파 차단을 위해 TV나 모니터 옆에 두기도 한다. 정전기 발생 억제로 쓰이고, 꽃병에 넣으면 구리와 물이 만나 음이온이 발생해 물이 빨리 썩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구리는 지금 시세로 톤당 1,100만 여원을 오르내린다. 생활 용도로 전락했다 하여 10원짜리를 우습게 볼 수 없는 이유다. 몇 년 전에는 동전을 녹여 판매하던 못된 사람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돈의 가치보다 소재의 가치가 더 나가니 나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범죄가 가능하다. 그런데 정당하게 동전을 녹여 수억 원을 챙긴 곳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국은행이 그 주인공이다. 한은이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은의 폐기 주화 매각 대금이 무려 34억 9,000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쏠쏠한 잡수익 규모에 또다시 놀란다.
판매처는 동 업체 풍산이다. 은행은 평소 시중에서 동전을 환수한 뒤 훼손, 오염, 소손(불에 타서 부서짐) 등의 사유로 다시 통용하기 부적합하다고 판정한 주화를 폐기로 분류한다. 이 폐기 주화가 늘어난 것은 시중의 동전 사용이 줄며 환수가 많아지고, 한은 금고에 쌓인 동전의 양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폐기 주화 중 일부를 풍산에 판매하면 풍산은 이 동전을 녹여 소전을 만들어 수출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은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건원중보라는 동전이 996년 성종 때 처음 만들어졌지만 널리 통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전하면서 비로소 금속으로 된 화폐가 전국적으로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화폐가 바로 1678년(숙종 4)부터 조선시대의 유일한 법화로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된 상평통보이다. 동전(銅錢) 또는 엽전(葉錢)으로 속칭되며 귀중한 경제 수단으로 쓰였다.
시대가 바뀌면서 동전의 위상도 바뀌고 있다. 급등하는 물가를 동전의 가치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활용도가 떨어졌지만 과거 저금통 속에서 어린아이의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눈깔사탕을 살 수 있는 것도 10원짜리 동전이었다. 그러나 카드 사용이 일반화된 지금은 폐기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다행히 재활용이 해결책이 되고 있다. 이 폐기 주화를 재활용함으로써 비철금속 생산 업체에는 원자재로써 유용한 자원이 되고 있다. 새로운 주화 생산에 필요한 자원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덤이다.
한은의 폐기 주화 매각은 재활용과 재원의 활용을 최대화하며 국가 재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화폐 관리 및 재활용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한다. 환경, 경제 및 화폐 시스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의 몫이 됐다. 10원을 들고 마냥 행복했던 유년의 추억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10원하던 라면 하나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10원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게 된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10원도 모이면 100원이 되고, 1,000원이 된다. 그 돈은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수도 있다. 가치는 떨어졌지만 10원이 죽지 않고 연명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