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 권하는 사회

폐업 권하는 사회

  • 철강
  • 승인 2024.10.0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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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손유진 기자 yjson@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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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포항 출장을 다녀왔다. 조용했던 동네가 잔치로 떠들썩했던 것과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근데 좋았던 것은 잠시였다. 요상한 경험으로 심리적 외상을 크게 입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항 철강산업단지는 폐업을 권하는 사회가 되고 있었다.

한 철강 제조사의 준공식에서 지자체 관계자들은 신소재, 첨단 산업, 2차전지 사업 등을 강조하며 축언했고, 사람들은 손뼉을 쳐댔다.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철강 전문 기자의 귀에는 그동안의 '2차 산업'을 위한 노고에 감사하지만, 포항시의 산업 지향이 '2차산업'에서 '2차전지산업'으로 중심을 옮기고 있으니 이에 맞춰 경영해달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불편한 감정을 뒤로하고 철강산단을 두어 바퀴 빙빙 돌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나. 중국산 코일이 실린 트레일러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두 눈을 비비며 이게 맞나 의심했다. 믿기지 않아 목요일과 금요일 땡볕 아래 그곳 그 자리에서 다시 지켜봤지만 내가 본 게 현실이었다. 중국산 코일들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뒤쫓아가 보니 표면처리강판업체나 조립금속업체로 들어갔다. 이들 업체 말고도 공개형 야적장 부지에는 중국산 원재료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다른 지역도 아니고, '영일만의 기적'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와 철강산업을 이끌었던 상징인 포항에서 중국산 코일들이 철강산단 거리를 부리나케 활보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중국의 한 성(省)에 위치한 포항시 그자체였다.

포항제철소 정문에 붙어있던 ‘資源은 有限, 創意는 無限’이 중국 간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철강단지에 대규모 입주하고 있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동국제강, 세아제강의 무게와 입지가 트레일러에 싣긴 몇십톤 짜리 중국 코일이나 선재 뭉텅이보다도 더 작게 느껴졌던 것도 기분 탓이었을까.

폐업을 권하는 사회다. 중국산에 손을 대면서 세상이 자기들에게 수입재를 권한다며 자신들의 신변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게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다. 원가절감을 위해서는 불량 제품이 나오는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중국산 수입이 철강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 만큼 현재 포항 철강산단의 위기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이자 한때 세계 철강 생산의 40% 이상을 점유했던 영국의 철강산업이 몰락했고, 미국의 US스틸 역시 일본제철에 인수가 추진되고 있으며, 최근 칠레 유일의 제철소는 중국과의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 수순을 밟고 있다.

이를 토대로, 비관적 시나리오를 짜보자면 포항시는 2차 전지 소재산업의 메카가 되기 위해 철강산업 근간에는 더 이상 힘을 보태주지 않을 것이다. 철강산단 제조사들은 주변에 철강 제품을 팔지 못하면 설비를 하나둘씩 정리하게 될 것이다. 이미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1제강·선재공장은 폐쇄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주변 업체들은 중국산 소재로 원가를 줄이려다 제품 불량으로 고객이 점차 끊기고, 결국에는 회사 제품보다 싼 중국산 완제품이 들어와 회사는 결국 문 닫게 될지도 모른다.

수소환원제철의 꿈도 못 꾼다. 적자 판매가 계속되고 있는 데 어느 세월에 몇십조 원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중국산 가격에 맞춰주려면 환경 비용이라도 줄여야 하니 수소환원제철이고 뭐고 파이넥스(FINEX)설비라도 안 꺼주면 다행이다.

포항 철강산단에는 총면적 400만 평에 347개 공장과 1만4,900여 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지금 이대로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수년 내 공장가동 중단과 대규모 인원 감축이 이뤄지고, 최종적으로 폐업 수순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철강산단의 구성원 모두가 결국 철강산업이 협업의 산물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상생의 길을 고민해야 한다. 그저 <오징어 게임>처럼 시장 경쟁에만 내던져 놓고 보다간, "이러다 다 죽어"라는 그 말을 실감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의 철강을 살려달라(Save Our Steel·S0S)"고 적은 피켓을 들고 산자부 장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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