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강원도 정선 삼척탄좌는 2,700여 명 광부들이 연간 150만 톤의 무연탄을 생산했었다. 당시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석탄산업이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삼척탄좌의 역사는 함경남도 함주가 고향인 유성연, 이장균 씨가 월남해 1955년 ‘삼천리연탄’을 공동창업하면서 시작된다. 동업자는 열심히 일을 해 1962년에 문을 연 삼척탄좌를 1970년에 인수한다. 그러면서 세 가지 원칙을 문서로 남긴다. 이 원칙은 공동창업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두 사람 간의 굳은 약속이었다.
그 원칙은 ‘첫째, 전 계열사 지분을 양가가 동일 지분으로 소유한다. 둘째, 어떤 비율로 투자하든 이익은 똑같이 나눈다. 셋째, 한쪽이 반대하는 사업은 절대 하지 않는다.’이다. 동업이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힘든 것 같다. 출발할 때는 서로 간이라도 빼 줄 정도로 돈독한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사업이 잘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뢰가 깨지는 것은 섬광처럼 빠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수없이 목격했다. 사업이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아집과 탐욕이 동반된 갈등은 결국 파멸을 불러오고야 만다.
세 가지 원칙도 지켜져야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휴지와 다름없는 한 장의 종이일 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원칙을 굳게 지키며 국내 최고 민영 탄광이라는 성공신화를 쓴다. 이 모범적인 동업자 정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1985년 KBS 주말연속극 ‘열망’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특히 2세 경영진도 선대 회장의 ‘아름다운 동행’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동업자 정신을 수십 년째 이어오며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비록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2001년 폐광됐지만 그 정신만은 오래도록 회자(膾炙)되고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볼썽사나운 경영권 분쟁이 이 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10월 13일 현재 기업이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공시한 ‘소송 등의 제기·신청’(경영권 분쟁 소송)이 73개사 242건으로 나타났다. 집계를 시작한 2000년대 이후 가장 많은 건수다. 유형도 다양하다. 동업자나 가족 간 갈등, 창업자와 투자사 간 충돌, 저평가된 기업을 겨냥한 공세 등 가지각색이다. 여기에 사모펀드(PEF)까지 가세하며 적대적·약탈적 인수합병(M&A)의 우려까지 키우고 있다.
사모펀드는 기업사냥꾼이다. 기업 인수는 경영이 목적이 아니다. 인수 후 구조 개편을 통해 매각으로 막대한 투자 이익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사모펀드가 국내에서 경쟁력 있는 회사를 인수한 다음 핵심 자산을 매각하거나 과도한 배당금 수령 등으로 투자금 회수에만 몰두하는 등 약탈적 경영을 일삼는 것을 많이 보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당한 인력 구조조정으로 직원과 지역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도의는 없고 이익만을 쫓는 전형적인 사냥꾼의 매정한 모습은 많은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니 마땅한 대책이 없다. 그들의 사냥감이 되지 않는 것만이 상책일 뿐이다. 최근 동업자 관계가 금이 가며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업체가 있다.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권 전쟁이 그것이다. 75년간 동업에 마침표를 찍은 이 전쟁은 1라운드를 마쳤다. MBK·영풍 측이 공개매수를 통해 5.34%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로써 지분은 38.47%로 늘어 일단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결과는 임시주총을 통해 판가름 나게 되었지만 사모펀드 MBK가 가세한 것이 심히 우려스럽다.
MBK가 영풍 측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이것이 현실이 되면 단순한 경영권 분쟁의 차원이 아닌 것이 된다. 고려아연은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업체이다. 국내외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회사다. 국내 대기업 현대차·LG·한화 등이 손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임시주총에서 경영권에 변동이라도 생기면 회사 진로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사모펀드 특성상 차익 실현을 위해 일부 사업·지분의 해외 매각 등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회사가 공들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고려아연은 백 년 앞을 꿈꾸던 건실한 기업이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방관만 하고 있으면 국내 기업은 사모펀드의 손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삼성도 현대와 같은 대기업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공격이 있으면 이에 상응하는 방어권도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은 것이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인 것 같다. 동업자 정신이 실종된 이 싸움을 보며 하늘의 두 선대 회장님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사태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도 몹시 불편하다. 상처뿐인 싸움을 빨리 끝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