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겸 고철연구소장(pentagram700@naver.com)

한국 철강업계가 위기에 처했다.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을 꼽으라면 트럼프 대통령도, 환경 규제도, 새로운 경쟁자 등장도 아니다. 중국산 수입, 수요 위축, 노동시장 경직성은 조금은 이유가 된다. 하지만 지난 20여년 간 철강산업 대외환경 개선을 담당해 온 경험에 의하면 놓쳐버린 게 너무 많다.
현대제철이 고로사업에 진출하기 전, 포스코가 유일한 고로 소재를 생산하던 시절에는 숨 죽인 질서가 있었다. 소재 수요자는 포스코에 잘 보여서 소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는 게 최고의 수익원이었다. 업계의 모든 구성원이 그런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현대제철이 고로 소재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처음 도입됐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승자였다. 이 경쟁을 계기로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강판 전문회사가 되었고, 현대제철도 현대자동차그룹의 일원으로 인하우스(In-house) 제철소의 강점을 각인시켜왔다. 냉연을 만들고 강관을 만드는 회사들도 이제 어깨 쭉 펴고 갑의 입장에서 주판알을 굴리면서 소재를 조달하고 있다.
조선회사들도 더 이상 정부에 찾아가서 후판 설비를 증설해달라는 로비를 안 해도 되었다. 철강사가 오랜 기간 동안 적자를 감수하고 지원했음에도 오히려 조선사는 외국산을 더 선호하고 있다. 한 회사는 후판에서 본 손해를 열연강판 구매에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도 업계의 적절한 보호막이 되었다. 산업용 전기요금도 배려해 주었고, 관세·비관세 장벽으로도 적절히 도와주었다. 제도화 초기 환경 규제도, 배출권거래제도 철강업계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 결과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재투자 재원을 확보할 정도의 수익성은 유지가 됐다. 그러나 이제는 이마저도 되돌아가기 힘든 과거가 되었다.
현실을 보자. 2024년 영업이익률이 포스코는 3.9%, 현대제철은 0.9%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재를 경쟁적으로 구매해서 적절한 가공을 한 회사는 5%에서 10% 사이의 수익률을 달성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놓쳐버린 게 너무 많다. 회사가 잘못한 것 중 으뜸은 R&D 투자 축소다. 자체 예산도, 정부 지원 확보도, 인재 투자도 너무 소홀했다. 그 결과 고객과 해외 경쟁사를 압도하는 킬러 제품(소재)이 없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수요가가 울트라 갑 위치의 고객이 되어도 원망만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개구리가 죽을 때는 물의 온도를 못 느껴 죽을 수도 있지만, 울타리가 너무 높아져서 뛰쳐나올 힘이 없어 죽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둘 다 일지도 모른다.
경영자들이 잊고 있는 놓쳐버린 것 중 또 하나는 실무자들의 의욕이다. 업계 선두 회사의 실무자가 죽을힘을 다해 규제 완화(강화)를 도입하면 그 혜택은 모든 회사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후발 회사들은 무임승차에 대한 고마움이 전혀 없다. 어떤 회사는 한국철강협회 탈회·입회를 반복하고 있다. 협회 밖에 있어도 선발회사가 대신 획득해준 전리품을 누리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이런 회사는 후회를 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그런 여건도 이제야 서서히 조성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무임승차 성과로 할당관세 인하, 철스크랩 수출 규제, 배출권거래제 완화, 전기요금 인상 저지(완화) 등이 있음에도 후발 회사들은 뒷짐지고 성과를 즐기기만 했다. 이런 규제 완화는 100% 사람의 일이며, 그것도 선발회사 위주로 일군의 실무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자기 회사에 대한 기여에 자긍심은 있지만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쌓여서 역으로 자기 회사에 부메랑이 되고 있는 현실에는 실망을 넘어 참 야속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R&D와 기술인력 투자는 각 회사가 알아서 할 일이다. 킬러 제품에 대한 필요성은 경영진이 잘 알 것이다. 자국 철강 소재의 경쟁력 없이 K-제조, K-조선, K-방산은 불가능하다. 나머지 철강 본업 경쟁력을 위한 아이템에 대해서는 자기 회사만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비대칭요소화 해야 한다.
다음으로 실무자들의 기(氣)를 살려야 한다. 실무자들의 의욕을 살리는 것은 참전한 군인의 사기를 높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철강업계에서 규제와 관련된 성과를 만들어내는 두 선발회사는 모두 전문경영인이 경영하고 있다. 윗 사람들이 특정 주기로 바뀌다보니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제도 개선 영역에선 실무자의 기여도가 대기업의 복잡다단한 성과 평가와 맞물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업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실무자들이 회사를 위한 비대칭 요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전기시장 직거래 활용이다. 현 전기사업법상 일정 규모 이상 고압 전기 사용자는 도매 전력시장에서 직접 구입을 할 수 있게 규정되어 있다. 또한 작년부터 시행된 분산에너지특별법 상으로 분산특구로 지정된 지역 내에서는 발전회사와의 직거래도 가능하다. 현실적인 문제는 송·배전 요금과 부대조건일 텐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각 회사 만의 특수한 이익 요인을 만들어 최근 급변하는 전력산업 정책과 발맞춰 제도적으로 관철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재생에너지를 포함한 친환경 역시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둘째는 철스크랩 산업 육성이다. 이 과제는 지난 20여년 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과제다. 다행히 산업부에서도 작년부터 이 과제를 심층 분석해서 여러 지원방안을 준비하고 있으나, 정부 부처에서 준비 중인 안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제도일 뿐이다. 이 제도를 발판 삼아 설비자금 운용과 철스크랩 등급별 지원사항을 각자의 회사에 유리하도록 세부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한 발자국 먼 미래를 내다보고 배출권 할당 등의 요소를 유리하게 결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셋째는 배출권거래제 대응이다. 2026년부터 2030년까지 배출권거래제 제4기가 진행된다. 올해 상반기에 업체별 할당 기준이 수립된다. 지금까지 철강업계에서 고로 업체는 무상할당을 계속 요구해왔고, 전기로 업체는 거래제 자체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철강업계가 어렵다는 것은 온 나라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조성됐을 때 역으로 유상할당을 회사가 선제적으로 주장하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장기적으로 보다 유리한 부대조건을 정부와 협상하는 게 더 좋다. 특히 유상할당이 시작되면 정부가 얻게 되는 유상경매 자금의 활용 방안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각 회사가 유리하게 조건을 협의할 수 있다. 명분을 주고 실속을 챙기라는 뜻이다.
바이든 전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도 이구동성으로 ‘철강=안보’를 강조하고 있다. 아시아든, 유럽이든, 미 대륙이든 통상과 산업 안보 이슈, 기후변화 이슈가 맞물려 전 세계적인 이목이 철강산업에 쏠리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지금과 같이 업계가 다 같이 어려울 때에 약간의 양보를 발판으로 미래의 더 큰 이윤을 이끌어 낼 비대칭적 선두화 요소로 무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수한 인재와 자금력, 높은 대외 네트워크를 잘 활용해서 ‘위엄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실무자의 기(氣)를 살려서! 이것이 결국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회사와 국가와 사회를 위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