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식 ESG 네트워크 대표 겸 고철연구소장
지난 11월 4일 관계부처합동으로 발표한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에 대해 논란이 많다. 철강업계의 요구사항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고 정부가 실현 가능성도 없는 정책만 또 나열했다는 주장도 보인다.
업계가 철강산업의 국면 전환을 위해 기대하고 있는 또 다른 빅이벤트는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을 위한 특별법)이다. 이 법이 통과되면 세제혜택과 R&D 인센티브, 금융지원 등으로 철강산업이 당장 숨통을 틔울 수 있을 것으로 다들 기대한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금의 철강업계는 글로벌 공급망 의존성과 사업 다변화로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등장해 지원 법령 하나만으로 생태계 전체의 판도를 바꾸기는 역부족”이라는 점이다. 올해 초 에너지 3법이 모두 특별법으로 입법되었음에도 관련 산업에서 가시적인 효과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결국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이든 ‘K-스틸법’이든 사회 가치 지향에 발맞춰 과감한 투자와 치열한 경쟁력 확보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이해관계자와 공유하는 기업에게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지원책에 편승해 적당히 수명 연장을 기도하거나 기업매각 등을 위한 출구 전략으로 삼으려는 얌체같은 기업도 등장할 것이다.
철강업계에서 오랜 기간 일하다 현직을 떠나 현재는 외부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교류하는 필자의 시각에서는 위와 같은 정부 및 국회의 제도적 지원 방안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의 실질적인 효능이 있을지 회의감과 우려가 더 크게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회의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철강업계가 아직도 스스로를 ‘국가 기간산업’으로 자칭하며 정부에 이에 상응하는 정책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철강을 기간산업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한 예로 COVID19 위기 당시 정부(금융위원회)가 발표한 7대 기간산업 대상의 ‘기업 안정화 지원 방안’에서 철강, 정유, 석유화학은 제외됐었다.
더 이상 기간산업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전기요금 합리화, 공정거래법 연성화 같은 요구에도 냉담한지 오래다. 철강업체들이 진심으로 철강산업을 국가의 기간산업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국가의 지원 정책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치열하게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국가의 정책 수단으로 철강업계를 만족시키기에는 철강 산업과 연관된 이해관계자가 다양해졌고 우선순위 역시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정부에서 올 4월부터 저가 수입 후판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해왔지만, 주 소비처인 조선소는 보세창고를 활용해 관세를 회피하며 많은 양의 후판을 수입했고, 오히려 같은 기간 국내산 후판 구매는 크게 감소했다. 철강업계의 복잡도가 올라간 만큼 다양한 기업체 간 공정한 지원이 이뤄지기도 어렵고 지원책의 효율성 역시 담보되기 어려운 것이다.
셋째는 비대칭원가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현 상황에서 정부 지원책이 힘을 쓰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이제 더 이상 값싸고 품질 좋은 철광석과 코크스는 경쟁력의 원천이 아니다.
오늘날 철강사 경쟁력의 큰 부분은 저탄소 공정 기술력, 재생에너지 및 원자력 전기와 같은 청정에너지 수급 여건, 녹색금융 확보 용이성 등의 요소들이 차지하고 있다. 가장 우려되는 행태는 방만한 철강사들이 정부 지원책에 기대어 연명하면서 오히려 이와 같은 영역에서의 체질 개선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넷째는 국내 철강업계가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가치 지향과 거리를 두어왔다는 점이다. 필자는 올해 6월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 스틸 다이내믹스 포럼(월드스틸다이내믹스 주최)에 참가했는데, 연사들의 발언 중 필자를 놀라게 한 내용이 있었다.
미국 누코어(NUCOR) 사의 부사장이 탄소감축에 대한 회사의 대응 전략을 이야기하며 이와 같이 발언한 것이다. “비록 새로운 행정부가 탄소와 관련된 부분에서 태도를 바꿨지만 NUCOR의 탈탄소 전략은 애초부터 외부의 압력이 아닌 회사 자체의 가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에 변동 없이 이행될 것이다.”
국내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철강사는 몇이나 될까? 오히려 스스로 내건 탄소 감축 시나리오를 지키지 못하고 여러 번에 걸쳐 수정하는가 하면, 배출권거래제는 입맛에 맞게 활용해온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누적된 불신은 위기에 처한 철강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물에 빠져도 손 내밀어 주는 이가 없을 것이다.
국가 지원 정책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치열하게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힘써야…
이러한 변화 앞에서 철강업계는 어떻게 변모해야 할 것인가? 큰 틀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하다.
먼저 철강산업, 철강업계라는 포괄적인 용어부터 세분화하여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표현은 과거 독과점적 위치의 기업이 철강 공급의 대부분을 쥐고 있던 시기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현재의 차별화된 가치 사슬과 다양해진 이해관계자를 포괄하지 못한다. 철강을 세분화하여 고로 철강, 전기로 철강, 단압 철강으로 구분하고 각자가 업종의 니즈에 발맞춰 독자적으로 또 때로는 연대하며 활동해야 한다.
이 가운데 고로 철강은 먼저 전면적인 태도 전환이 필요하다. 2035 NDC 발표와 발맞춰 지금까지 공언해온 이산화탄소 감축 로드맵이 현실적으로 이행 불가능함을 뒤늦게라도 인정하고, 어떤 판단 오류로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을 수립했는지, 어떤 부분에서 기존 계획과 실행의 괴리가 발생했는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감축 로드맵은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내외부 모두에서 현실성을 검증받은 안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솔직한 태도 없이는 수소환원제철의 기술적인 난이도와 미래 수소 공급 확보의 어려움을 알릴 수도 없고, 꼭 필요한 지원에 대한 사회적 여론의 지지 역시 받을 수 없다. (참고: 일본제철 하시모토 회장 “시험 베이스에서 CO₂를 43% 줄인 세계 최고의 결과를 얻었지만 수소 환원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할 수 있어도 그린수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 2025.10.31. 일본철강신문 인터뷰)
또한 앞에서 언급한 누코어 부사장의 발언을 참고하여 고로 철강사들 역시 스스로가 어떤 가치에 기반하여 경영되는지 정의하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혹자는 누코어는 전기로 회사니까 가능한 태도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고로 철강사도 단지 탈탄소의 호흡이 전기로 회사 대비 길 뿐 그들과 같은 가치를 채택하고 이를 경영 전략에 반영하는 데에는 그 어떤 제약도 없다. 이렇게 근본적인 가치 설정에서부터 우물쭈물하지 않고 확실한 입장을 전달할 수 있어야 미국(이전 행정부)과 일본과 같이 정부의 적극적인 저탄소 철강 전환(GX) 지원을 당당하게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철강을 세분화하여 고로 철강, 전기로 철강, 단압 철강으로 구분하고
각자가 업종의 니즈에 발맞춰 독자적으로 또 때로는 연대하며 활동해야…
또한 고로 철강은 과잉 설비에 대해 진지한 분석과 해소책을 제시해야 한다. 국내 11기의 대형 고로는 현재 대한민국의 산업 여건 상 과잉임이 분명하다. 고로 철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원료 조달, 제조공정 관리, 제품 협상력은 물론 국가적 과제인 탄소 감축 등을 주제로 단일 기업이 아닌 ‘K-스틸’ 차원의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현재 가장 큰 고로 철강 2사는 현지 완결형 제철소를 추진하고 있기에 국내 생산 설비에 대한 재검토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러한 전략을 수립할 때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적극성과 선제적인 태도이다. 한 예로 제4기 배출권거래제와 관련해서도 과거부터 정부로부터 유상할당 시행에 대한 시그널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고로 철강은 아직도 조건 없는 무상할당만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태도란 고로 폐쇄가 불가피하다면 기 할당된 탄소배출권을 연계·활용하여 폐쇄에 따른 고용 등의 부작용을 어떻게 완충할 것인지 등의 조건을 정부에 제시하는 것이고, 유상할당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수용할 것은 수용하되 유상할당을 통해 확보된 기금을 어떻게 탈탄소를 위한 재투자 용도로 활용할지 정부에 제시하고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제철과 JFE가 자국 내 고로설비 감축을 통해 경쟁력을 제고하고 이를 기반으로 US스틸 인수 등의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는 것을 가르침으로 삼아야 한다.
전기로 철강의 영역에서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줄 내용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재투자에는 인색한 채 수십년 된 설비로 범용제품을 생산해서 잘 생존해 왔기에 이제는 위기를 맞더라도 다른 철강 구성원에 우선해서 전기로 철강을 지원할 명분이 부족한 것이다.
전기로 철강 업계 스스로가 무덤을 판 측면도 있다. 수입품에 대응해서 신KS 인증 등을 추진했지만 암묵적으로 다들 반대했던 것이 일례다. 탄소 중립이 화두가 될 수록 전기로 기술이 가진 잠재력은 커짐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철스크랩 산업을 육성하여 공급망을 고도화한다던가 설비 투자와 R&D의 비중을 늘리는 등의 활동에 큰 틀에서는 무관심했고 결국 골든 타임을 놓친 부분이 있다.
최근 한 경제신문 1면과 3면을 차지한 철근 구조조정 기사가 화제가 됐다. 누가 봐도 의도된 기사였다. 철근 2강 회사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논조였는데, 컨설팅 업체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동원해서 그럴듯한 논리를 폈다. 기사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철근 회사 3세 오너가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이용해서 자기는 알맹이 챙겨서 나갈 테니 그 대신 정부가 구조조정펀드를 만들어서 고용과 뒤처리를 해달라는 내용이다.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행태이다.
전기로 철강 구조조정은 비교적 단순하고 사회적 여파도 비교적 적다. 한두 회사가 문을 닫더라도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고용 문제도 각 회사가 가진 자산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에 국가가 나설 이유가 없다. 정 힘들면 금융권이 시키는 대로 하고, 그게 싫으면 지금이라도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세워서 하면 된다.
단압 철강은 지금처럼 하면 될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저렴하게 소재를 구매해서 고가의 제품을 판매하는 일반적인 장사를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철강업계 전반의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한국철강협회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고로, 전기로, 단압 협회로 구분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싶다. 이해관계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회사들이 합의점에 이르지 못한 채 알맹이 빠진 대책으로 실기하는 일은 각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현행처럼 상근 부회장을 산업통상자원부의 인사로 할지, 새로 확장된 기후에너지환경부 인사로 할지, 아니면 다음 임기부터는 철강인 출신으로 할 것인지도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시장의 논리와 소비자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지는 기업은 그 끝이 정해져 있다. 철강업계 지원책을 준비하는 정책입안자들은 철강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기업들을 도와야한다. 불 지피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지금까지 태평하게 행동해온 기업들이 경쟁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되도록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결국 건실한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고 강한 산업을 육성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