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金), 은(銀), 동(銅)은 올림픽에서 메달 순위다. 보석의 가치를 따져서 매긴 순위이기도 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온 국민이 환호한다. 그러나 은과 동으로 내려가면 호응이 덜하다. 하지만 선수들의 노력을 메달 색깔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금메달을 못 따도 흘린 땀은 소중하다. 당연히 인정해 주는 것이 맞다. 동(銅) 메달이라고 해서 절대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려 세계에서 세 번째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을 한 선수만이 가능하다. 치열한 예선전을 치르고 난 후에야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자리다.
가치를 따진다면 동(銅)이 금과 은보다 못하다. 그러나 유용한 쓰임에 있어서는 동을 따라올 수 없다.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백성들의 심연(深淵)에 자리한다. 서라벌 하늘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백성들의 불심을 자극한 것이 범종(梵鐘)이다. ‘에밀레’하고 소리를 냈다는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의 귀중한 유물이다. 경주 국립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이 종을 만든 소재가 동이다. 이 종에 얽힌 전설은 알고 있었지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몰랐다. 높은 예술의 경지인 공예와 함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동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있다. 안성(安城)은 예로부터 유기가 유명했다. 안성 유기는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물품이 견고하든지, 사기가 확실하든지, 소홀히 하던 물건이 갑자기 필요에 딱 맞으면 ‘안성맞춤’으로 통용됐다. 지금은 주문자가 만족스러워하는 맞춤 제품이란 뜻으로 발전했다. ‘최상의 제품 혹은 상황’까지 폭넓게 쓰인다. 이 안성 유기를 만드는 소재가 동이다. 놋그릇으로 불리는 이 방짜유기에 음식을 담아두면 여름에도 변하지 않는다. 동이 세균 번식 방지에 탁월함이 입증된 것이다.
일상 속에 동이 또 있다. 이제는 효용 가치가 뚝 떨어진 옛날 10원짜리 동전이 그 주인공이다. 알사탕 하나에 10원이었던 시절 어머니 지갑 속에서 유난히 애를 태웠다. 때를 쓰는 동심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10원을 주면 구멍가게로 신이나서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결제가 카드로 바뀐 세상은 동전의 유용성을 빼앗아갔다. 10원짜리 동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없어진 것은 더욱 슬프다. 시골 경로당 어르신들 고스톱 판돈으로 전락한 딱한 사정이 아쉽기만 하다. 그 10원이 동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글로벌 속 구리의 경제적 위상은 높다. 구리는 ‘닥터 코퍼’라고 한다. 구리 가격이 경제 건강을 예측하는 데 워낙 유용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구리는 건설, 전자제품, 자동차 등 산업 전반에 걸쳐 널리 쓰인다. 그래서 수요와 가격이 경제 흐름을 읽는데 유용한 단서가 된다. 경제가 활력을 띠면 가격이 오른다. 반대로 침체하면 내려가는 경향이 뚜렷하다. 구리가 경제 활동의 바로미터 기능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구리 가격 형성에 비교적 입김이 센 곳이 중국이다. 전 세계 소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니 당연한 결과다.
최근 구리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다. 가격이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미국의 관세 정책에 따른 공급 부족 위기감과 중국의 경기 부양 기대감이 겹치면서 나타난 결과다. 앞으로 최대 30%까지 더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구리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관세 부과 가능성이 커지자 관세가 확정되기 전 재고를 미리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이에 전문가들은 구리가 더는 경제 선행 지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실망한다.
그렇지만 구리는 앞으로 더욱 주목받을 가능성이 크다. 전기자동차와 재생에너지 산업이 성장하면서 구리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전기차 한 대는 내연기관차보다 구리를 세 배나 더 쓴다고 한다. 풍력 터빈이나 태양광 패널도 구리 없이 못 만든다. 이 흐름이 구리 가격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하다 보면 올림픽에서 금, 은, 동이 아니라 금, 동, 은으로 바뀌지 말라는 법도 없다. 범종만 유물이 아니라 10원짜리 동전도 유물이 될 수 있다. 바야흐로 동 역전의 꿈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코로나 사태 때 구리가 가진 살균 효과에 주목했다. 이에 구리 섬유를 사용한 마스크가 개발되어 시중에 유통되기도 했다. 갈수록 희소성이 커지면서 재테크 수단으로도 등장했다. 골드바나 실버 바처럼 브론즈 바가 등장한 것이다. 인류가 구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소 1만 년 전부터이다. 지금쯤 고갈돼야 하지만 우리 생활에서 여전히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무한한 재활용 성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수요 대비 공급이 달리는 것이 항상 문제다. 더욱 귀하신 몸이 되어가고 있는 구리의 앞날이 태양처럼 밝은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