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S 그림자’ 벗지 못한 한국 철강…기준 실종이 부른 열연 유통시장 불신

‘JIS 그림자’ 벗지 못한 한국 철강…기준 실종이 부른 열연 유통시장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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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5.04.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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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이형원 기자 hwlee@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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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성적서·섞어팔기 반복…“JIS 관행 벗고 KS 확산해야”
경계 흐려진 열연 시장…‘국산 둔갑’도 비일비재
JIS의 유산…비표준 강재가 시장을 점령하다
“KS는 있는데, 기준은 없다”…제도 사각지대가 만든 공백

국산으로 둔갑한 수입산 철강재가 국내 유통시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다. 정품, 수입대응재, 저가 수입산이 구분 없이 뒤섞이면서 제품에 대한 신뢰는 물론 가격 체계도 무너진 상황이다.

현장에서는 허위 성적서 발급, 섞어팔기 등 비정상적인 유통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으며, 철강업계는 그 배경으로 표준체계의 부재와 유통망 관리의 허술함을 지적하고 있다.


◇ 경계 흐려진 열연 시장…‘국산 둔갑’도 비일비재


철강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열연 유통시장은 표면적으로는 ‘정품’, ‘수입대응재’, ‘수입산’으로 구분된다.

다만 실제 거래 현장에서는 정품과 수입재의 경계가 흐려져 있다. 일부 유통상은 정품처럼 위장한 수입재를 고가에 판매하거나, 허위 밀시트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불법 유통을 자행하고 있다.
 

사진은 포스코가 생산한 열연 제품. /포스코
사진은 포스코가 생산한 열연 제품. /포스코

제조사 직영 가공센터나 1차 유통망에서는 비교적 투명한 거래가 이뤄지고 있지만, 문제는 2차, 3차 유통 단계로 내려가며 품질 이력 추적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데 있다. 특히 가공된 철강재는 맨눈으로 국산과 수입산을 구별하기 어렵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특히 철강재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수요가일수록 이 같은 문제에 노출되기 쉽다”라며 “국산이라더니, 나중에 보니 GB(중국국가표준) 규격 중국산이었다는 식의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지난해 현대제철은 자사 밀시트가 위조돼 수입대응재에 부착된 사례를 확인하고, 불법 유통을 제보한 판매점에 포상하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그러나 실제 적발은 쉽지 않고, 불법 행위에 따른 수익이 적발 리스크보다 크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 JIS의 유산…비표준 강재가 시장을 점령하다


한국 철강산업은 ‘기술 수입형’으로 출발했다. 1960년대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차관 확보에 실패한 뒤, 일본 야와타제철과 후지제철(현 NSC), 일본강관(현 JFE) 등으로부터 자본과 기술을 들여왔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JIS(일본공업규격) 체계가 국내 철강산업의 기반이 됐다. 당시로서는 기술·자본 모두 부족했던 한국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이에 생산 공정부터 품질 기준, 제품 명칭까지 일본식 시스템이 전반에 이식됐으며, 이는 곧 ‘JIS는 곧 신뢰’라는 산업적 인식으로 굳어지게 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문제는 이러한 관행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라며 “국내 강재 표준인 KS는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제 유통 현장에서는 JIS 규격만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KS 제품을 요구하는 수요자조차 드물다”라고 지적했다. 
 

사진은 현대제철이 생산한 열연 제품. /현대제철
사진은 현대제철이 생산한 열연 제품. /현대제철

이어 “결국 국내 유통시장은, 자국 표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준 없는 시장’으로 고착된 셈”이라며 “이런 구조는 비표준 강재의 범람을 사실상 방치하는 통로가 됐고, 중국산 GB 강종이나 CP400(비공식 일본 제조사 자체 규격) 무늬강판처럼 검증되지 않은 제품들이 기준인 양 유통되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부연했다. 

결국 일본 기준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지속되면서, 국내 시장은 표준에 대한 자율적 감시 기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감시 공백을 틈타, GB 강종과 CP 무늬강판 등 비표준 강재들이 대거 유입됐고, 유통 현장에서는 기준도 아닌 이들이 사실상 기준처럼 통용되는 구조가 굳어졌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유통향 열연강판 수입은 월평균 3만 톤 수준이며 이 중 60%가량이 중국 내수용 GB 규격이다. CP강종 무늬강판은 전체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월 3천 톤이 유입될 정도로 보편화된 상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공식적인 표준 없이, '표준을 흉내 낸' 강재가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평가했다. 


◇ “KS는 있는데, 기준은 없다”…제도 사각지대가 만든 공백


철강업계는 시장 정상화를 위한 핵심 과제로 ‘KS 기준의 실효성 확보’를 꼽는다. 국가기술표준원은 2016년 건설용 철강재 KS 기준을 개정하며, 기존 인장강도 중심 체계를 구조안전과 직결되는 항복강도 기준으로 전환했다.

이후 봉형강 시장에서는 KS 제품이 점차 기본 사양으로 자리 잡았지만, 열연 유통시장에서는 여전히 KS의 실질적 영향력이 미미한 실정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열연강판이라는 소재 자체에 대한 품질 표준이 없다는 점”이라며 “최종 제품은 KS 기준을 따르지만, 그 기반이 되는 소재는 규정 외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소재에 대한 표준이 미비한 상태에서 품질 이력 추적이 어렵고, 유통 과정에서는 저가·저품질 소재 유입이 반복되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수요가들이 KS를 원해도, 정작 해당 강종에 대한 KS 기준이 없는 경우도 많다”면서 “KS 강종군을 확대하고, 유통 단계에서 품질 추적과 성적서 검증 시스템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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