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추석이 저만치 다가왔다. 유년 시절 유난히 손꼽아 기다려지던 명절이었다. 추석빔이 기다려졌고, 도시로 돈을 벌려간 삼촌이 기다려졌고, 온갖 맛있는 음식이 기다려졌다. 그 추억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긴 기다림이 지칠 법도 한데 동심은 하루에도 몇 번씩 동구 밖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 애틋한 기다림이 끝나갈 즈음 어머님은 새 옷을 사 와 추석빔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삼촌이 가득 선물을 안고 고향으로 오면 추석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1970∼80년대의 흐뭇한 추석 단상(斷想)이다. 가난했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유난히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명절이 기다려진 것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정담을 나누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이런 측면에서 추석은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특히 가족문화가 뿌리 깊이 자리 잡았던 옛날은 더욱 그랬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 명절 문화도 변화를 거듭했다.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현실은 각박하고, 안타깝다.
우선 차례상 준비가 그렇다. 추석 전 매스컴을 통해 단골로 나오는 것이 차례상 비용이다. 물가와 연동해 평균 비용이 나온다. 그 비용은 전년과 비교해 낮아진 적이 없다. 서민들의 한숨이 깊어지는 이유다. 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형편에 맞게 정성껏 차리는 것이 올바른 차례상일 것이다. 굳이 비용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풍성함보다 정성을 담으면 조상들도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 적어도 인터넷에 추모공간을 마련해 놓고 성묘하는 것보다는 났다. 조상들이 노할 요지경 세상이 코로나 이후부터 생겼다.
옛날 차례상에 올라갈 음식을 손수 준비하시던 어머님이 생각난다. 송편을 반달을 닮게 예쁘게 빚으시던 어머님은 그 많은 음식 장만에 불평 하나 없으셨다. 세월이 흐른 지금 며느리들은 손수 송편을 빚지 않는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해결한다. 차례 음식도 마찬가지다. 이에 명절만 되면 고된 노동에 지쳐 애꿎은 남편만 잡던 며느리들의 명절 증후군도 많이 사라졌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조상님들이 이것을 이해해 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뒷산의 솔잎을 따다 송편을 빚고 찌던 어머님과 같은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명절이 되면 무엇보다 섭섭한 것은 있고, 없음이다. 무심한 세월은 빼앗아 가는 것도 많다. 특히 명절에는 이것을 절실히 느낀다. 손주들을 사랑으로 보듬던 할머니는 뒷산으로 가셨고, 막걸리 한잔에 흥에 겹던 아버지도 뒷산에 누우셨다. 젊고 예뻤던 어머니는 백발의 허리 굽은 노인으로 힘들게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삶의 이치라지만 소중한 사람을 앗아간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그 세월을 잡을 수 없음은 더욱 아쉬웠다. 다만 잊지 못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이다. 내리사랑은 그들을 통해 배웠고 다시 잇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다가왔다. 연휴가 최장 열흘에 달하면서 현실과 마주한 직장인들의 셈법이 복잡하다. 지출해야 할 비용이 큰 부담이다. 봉급은 제자리인데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 때문이다. 즐거워할 명절이 비용 때문에 즐겁지 않다면 이 또한 불행이다. 다만 어느 조사에 의하면 효도 비용이 최고를 차지한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당연히 자식의 도리인데 이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실망스럽다. 부모는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주었다. 당연히 빚을 내서라도 용돈을 드려야 한다. 그것은 비용이 아니고 자식된 도리다.
지금은 핵가족시대이다. 가정에는 할아버지도 없고, 할머니도 없다. 명절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명절 취지를 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단순히 공휴일로만 인식한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해외여행을 떠나고 취미 생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전통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명절이 되면 흩어졌던 가족이 모여 안부를 묻고 우애를 다지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다. 웃어른에게 용돈을 드리고, 웃어른은 아랫사람에게 용돈을 주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비용과 연결하는 것도한참 잘못됐다.
세태가 변하는 만큼 명절 문화도 변한다. 이것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우리가 명절이면 향하던 고향은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도시의 화려함 속에 잃어버렸던 따뜻한 마음을 되찾아 주는 곳이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마음속에서 가장 따뜻한 곳으로 기억한다. 달라진 명절이 서운하기도 하지만 이번 추석은 고향을 찾아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감성을 되찾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향은 치유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