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의 전설적인 장거리 육상선수 에밀 자토펙은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다. 인생은 단거리경주처럼 빠른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라톤처럼 긴 호흡으로 꾸준히 달려야 한다는 의미다. 마라톤은 초반에 너무 무리하면 후반에 체력이 바닥나 완주가 어려워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일, 돈, 건강, 인간관계 등을 무리하게 몰아붙이면 몸과 마음이 지치고 상하게 된다. 중간중간 쉬어가며 리듬을 조절하는 것이 오래 달릴 수 있는 비결이다. 인생 마라톤에서 중요한 것은 남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결승선 도착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
긴 인생 여정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회복에 공을 들여야 한다.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 피로도 풀어주어야 마침내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하면 완주하기도 어렵고 탈이 날 수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중간에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듯 인생도 적절히 회복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과한 것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이 진리가 틀리지 않음을 생활에서 수없이 실감한다. 이처럼 마라톤은 운동 경기이지만 바른 삶을 인도하는 교훈이 되기도 한다.
손기정이라는 이름을 빼놓고 마라톤을 얘기할 수 없다. 그는 실제로 마라톤 선수였지만 인생도 마라톤처럼 길게 달렸다. 그의 여정은 일제 강점기를 시작해 6·25 전쟁을 지나 1988년 올림픽, 2202년 월드컵까지 90여 년을 고락과 함께 달렸다. 특히 그의 여정에서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빼놓을 수 없다. 10만 관중이 지켜보는 스타디움에 그가 당당하게 선두주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결승선까지 전력 질주를 해 2시간 29분 19초 2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나라를 잃고 일본을 대신해 달린 비운의 선수였다.
환호는 쏟아졌지만, 메달 시상대 위의 현실은 냉혹했다. 영예는 일본 국적 아래 기록되었고, 손기정은 국적 없는 승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담담하게 남긴 말은 “나는 한국인이다”였다. 이 선언은 메달보다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한국 마라톤의 뿌리는 이 순간부터 시작됐다. 패배 의식을 넘어 민족의 자존을 지켜낸 발걸음, 그것이 손기정이 남긴 위대한 발자취였다. 이후 황영조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몬주익 언덕을 넘어 첫 금메달을 따며 선생의 숙원(宿願)을 풀었다.
우리는 그의 정신을 되새긴다. 손기정의 질주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주었고, 억압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켜낸 상징이었다. 이 정신을 우리 업계가 본받아야 한다. 지금 우리 업계는 식민지 조선의 24세 청년이 처했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미국과 유럽의 관세 폭탄은 깊은 좌절과 맞닥뜨렸던 식민지 청년의 아픔과 닮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시상식 이후 쏟아지는 취재진 질문에 그의 답은 명쾌하고 당당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에게는 ‘KOREA 손기정’이라고 적었다.
이 당당함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도 좌절하지 않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우리 업계가 그동안 순탄하게 사업을 영위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오늘에 이르렀다. 마라톤처럼 중간 급수대에서 물을 마셔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잠시 숨 고르기를 통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무리하게 몰아붙이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완주하는 것이다. 숨이 터질 듯한 극한의 시간을 버터야 결승전에 도달하는 마라톤처럼 지금은 뼈를 깎는 이픔을 참는 인내가 필요하다.
정부의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 발표가 임박했다. 이 방안은 단기가 아닌 먼 미래를 내다보는 대책이어야 한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장기적으로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보여주기식 방안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예상보다 발표가 늦어지며 뜸을 들이는 것은 긴 산고(産苦)라고 생각한다. 이 고통이 아들이 귀한 집에 옥동자를 낳은 것처럼 큰 기쁨을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라톤과 인생이 긴 여정 뒤에 결승선을 통과하듯이 그런 옥동자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울러 인생 마라톤에서도 승리하는 우리 업계 구성원들의 미래도 아름답게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