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강판의 신화, 철강산업 큰 별 지다

석도강판의 신화, 철강산업 큰 별 지다

  • 철강
  • 승인 2013.01.28 08:50
  • 댓글 0
기자명 문수호 shmoon@snm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석도강판 국산화 실현, TCC동양 손열호 명예회장 별세

  국내 철강 산업의 원로인 TCC동양(구 동양석판) 손열호 명예회장이 향년 93세로 27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석도강판사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손열호 회장은 50여년이 넘는 주석도금강판 국산화를 실현한 국내 철강 산업의 산증인이다.

▲ TCC동양(구 동양석판) 손열호 명예회장.

  6.25 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도 철강제조업에 뛰어들어 ‘석도강판’을 향한 뚝심하나로 ‘주석도금강판의 국산화’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회사 설립 당시 그의 가슴 속엔 “내 손으로 조국을 부강하게 할 수 있다면 물 불 가리지 않고 일하겠다”는 열정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손 회장은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주석도금강판’ 국산화 실현을 위해 철강제조업에 뛰어들었고, 치밀한 준비와 노력 끝에 1962년 국내 최초로 석도강판 자체 생산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국내 최초로 현대화된 연속 전기석도금, 아연도금강판, 전기동도금강판 등의 기술들을 국산화했으며, 이를 토대로 내수뿐만 아니라 수출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달성해나가며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손 회장은 사회공헌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1976년 우석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금, 산업체기술연구비, 대학교 연구비 등 다방면에 걸친 지원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설립 초 24명으로 시작한 장학생도 해마다 증가해 학자금을 지원받은 학생은 지금까지 2,200여명 이상이며 총 지급액은 31억원의 규모에 이른다.

  ■ 철강산업의 불모지에서 꽃피워낸 기적

  ‘석도강판’이란 ‘주석도금강판’의 줄임말로, 주로 음료수, 통조림 등 식품용기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며 에어졸, 페인트관 같은 산업용기로도 쓰인다. 손열호 명예회장은 1959년 일본 등 선진시장에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식자재 금속 포장재인 석도강판 사업을 국내처음으로 시작해 창업 3년만인 1962년 국산화에 성공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당시 한국에는 주석도금강판을 생산할 기술이 없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시장에는 미국에서 고철 값에 들여온 불량 석판이 지천에 널려 헐값에 유통되고 막대한 외화가 국외로 유출되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의 지원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9년 연마석 제조 사업을 하던 손 회장은 제관 업계에서 석판을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는 것에 창안, 산업의 장래성을 확신하고 한 가지 결단을 내린다. 그는 석판 제조 지식이 전무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3천평 부지와 공장을 인수해 최초의 동양석판을 설립했다. 뒤이어 1961년 7월에는 일본의 동양강판의 기술과 설비를 도입해 1962년 5월 7일에 국내 최초 도금 강판 설비 준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당해 9월, 창업 3년 만에 주석도금강판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국내에서 생산된 최초의 ‘석도강판’ 제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전량수입에 의존하던 식품보관용 스틸캔의 원재료인 석도강판을 더 이상 수입하지 않고서도 100% 국내 기술로 공급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기술독립’의 쾌거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창업자인 손열호 명예회장이 식품보관용 스틸캔의 원자재인 석도강판 사업의 성장성에 대한 믿음과 국산화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손 회장은 ‘우리 손으로 해낸 것이 의미가 있다’는 기치 하에 석도강판의 생산 뿐만 아니라 생산기술 및 제조설비의 국산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64년에는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에 따른 전쟁 물자 마련으로 인해 석판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 이로 인해 추가 생산을 위해 설비를 새롭게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외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기존에 일본에서 도입한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기술을 연마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66년 TCC동양만의 힘으로 도금기 2대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단순히 설비의 생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품 생산 전 과정에서 온전히 자국화된 원천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또한 수입에 대한 의존을 덜게 되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쾌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을 바탕으로 1969년 국내 최초로 현대화된 연속 전기주석도금(Electrolytic Tinning Process: ET도금) 설비를 사내 기술로 설계·완성하는 업적을 이뤄냈다.

  이후에도 손 명예회장은 업계 선도를 위해 새로운 기술개발과 설비에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80년에는 국내 최초로 전기아연도금강판을 개발했고 1985년에는 전기동도금강판의 개발에도 성공해 기술의 국산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전해크롬산처리강판을 제외한 모든 생산 라인을 점차적으로 자체 기술에 의해 개발·설치하는데 성공햇다.

  이를 발판으로 꾸준히 성장해온 TCC동양은 ‘세계적인 표면처리강판 전문 회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TCC동양은 현재 동남아, 미, 일, 유럽, 남미, 중동 등 세계 40여개 국가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2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9년 설립된 TCC동양의 역사는 2013년 현재 5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 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손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해외 시장에도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진출 가능성을 타진했었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제품의 품질을 관리하고 공관 등에 통조림 제품을 공급해왔다. 드디어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게 되어, 대만 물자국 명의의 입찰 초청서를 받게 됨으로써 해외 진출의 기회 또한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TCC동양은 처음으로 직수출을 성공하기에 이른다.

  1980년에 들어서는 내·외적으로 도전이 끊이지 않았다. 내적으로는 국내 경쟁업체가 성장하고 있었고, 외적으로는 석유파동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명예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일환으로 1982년 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개설했고 기존 동남아시아 거래처와의 유대도 더욱 견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82년 ‘1천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83년에는 수출량을 두 배로 증대시킴으로써 ‘2천만 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는 업계에서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하는데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강판제품뿐만이 아니라 플랜트를 수출하는 것이 그의 차기 목표가 되었다. 플랜트 수출은 제품 수출보다 규모가 크고 경제 및 기술 협력 등의 보다 큰 부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1989년에 현실화되었다. 태국 사이암 틴플레이트사에 총 공급가 3,100만 달러의 연간 12만 톤 규모 석도강판 및 전해크롬산처리강판 겸용 라인을 제작·공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인 1994년에는 중국 해남성에 총 5,400만 달러 규모 중 2,5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설비를 제작·공급하게 됐다. 35년 전 일본의 기술과 설비를 도입해 석도강판을 제작하던 TCC동양이 이제는 다른 국가에 자사의 기술과 설비를 이전하게 되는 괄목상대 할 만한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해외시장에 직접 진출하기에 이른다. 휠링피츠버그사(Wheeling Pittsburgh Steel Corp.)와 합작으로 총 투자액 8,000만달러에 달하는 투자계약을 맺고 미국에 직접 공장을 짓고 기술과 설비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오하이오 코팅스 컴퍼니(Ohio Coatings Company)가 설립됐고 이는 TCC동양의 미대륙 전역 진출을 위한 도약의 시발점이 됐다.

  ■ 사람이 재산이다

  손 명예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람이었다. 경영자가 아닌 사원들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원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심어주고 싶어했다. 따라서 사내교육에 힘쓰고 직원들의 해외 연수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재를 기르는 것이 곧 개인의 발전이고 국가의 발전임을 깨달은 그는 1976년에 우석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재능 있지만 뜻을 펼치지 못했던 이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기업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지금의 TCC동양을 있게 한 국가와 사회에 대하여 보은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그는 1988년에 손봉락 사장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나 정책자문 및 설비투자에 대한 조언 역을 수행하며, 교육 및 사회공헌 사업을 꾸준히 펼쳐 왔다.

 

 우석손열호(孫烈鎬)명예회장연보

-1921년경북영주출생
-1959년TCC동양(구,동양석판) 설립
-1982년대통령산업포장수상
-1984년독일쉴러인터내셔널대학명예박사
-1987년새마을훈장협동장수상
-2000년~ 2013년,TCC동양(구,동양석판) 명예회장

 

저작권자 © 철강금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