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철과 같은 마음으로④ - 이운형 회장, 세아는 사람이다

(추모 특집) 철과 같은 마음으로④ - 이운형 회장, 세아는 사람이다

  • 철강
  • 승인 2020.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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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황병성 bshwang63@sn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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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분이셨다 … 큰 도움 받은 적 있다”

 

■ 스스로가 이정표가 되다
 이운형을 오래 만나온 지인 중 많은 사람이 그를 본받고 싶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어느 동료 기업인은 “사람들은 날 꽤 괜찮게 보는데 나는 이 회장님의 구두끈 맬 정도도 못된다.”고 까지 말하며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행동을 비춰보게 하는 바른 행동의 표상이었다. 

경영자로서 그를 말하려면 가장 주목해야할 것이 ‘경청’이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공감하고 지지해 주는 것, 이런 경청의 태도는 회사에든 밖에서든 그가 사람을 만나는 관계의 모든 면에 걸쳐있는 인상의 시작점이었다. 자기 생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직원들은 회장 앞에서 초조해 하지 않았다.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 격려가 되어 자신감을 갖고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성취감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무엇이든 장기적으로 보았다. 임직원들에게 “우리는 마라톤을 하는 겁니다.”라는 말을 자주했던 그는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단기성과에 급급하지 않았다. 추진하는 한 건 한 건의 결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직원들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며 기쁘게 일할 수 있다면 당장은 아니라도 그 결과가 언젠가 돌아온다는 것. 결과는 과정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내면의 신념이 있었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 

담당자의 의견을 구하는 데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수시로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하고 마치 동료 간에 의견을 나누듯 격의 없이 질문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했다고 한다. 그런 공유를 통해 직원들은 적어도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어떤 쪽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소신에 단호한 사람이었다. 믿어줄 때와 마찬가지로 잘못한 일을 문책할 때도 거기에는 분명한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는 과정의 성실성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일의 결과만으로 직원을 추궁하지 않았다. 

결과가 안 좋으면 그 이유를 자세히 검토하는 평가회의를 하는데, 과정에 문제가 없었고 그 시점에서 판단하기에 최선의 선택이었다면 문제 삼지 않았다. 잘해보려다가 실수한 것에 대해서 관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태만이나 윤리를 벗어난 행위는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이해관계자들에게 뒷돈을 받는다거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특정업체에 특혜를 준다거나, 또 직장 내 지연이나 학연으로 파벌을 조성하는 일도 회사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고 용납하지 않았다. 반드시 인사조치가 뒤따랐다고 한다.     

■ 머리 좋은 사람보다는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 선호

50년 세아의 역사에서 이운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머리 좋은 사람보다는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뽑아 최고의 인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세아의 정신이었고 기업 문화였다. 그는 1980년 사장으로 취임하며 전 직원을 상대로 자신의 경영이념을 공표했다. 

그는 능력 위주의 인사제도 시행을 거론했는데, 그가 제시한 능력 있는 인재의 첫 번째는 ‘인간관계’였다. 단순히 좋은 관계를 맺는 처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언행에 인간적인 덕목을 지키면서 누구와도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그가 이러한 인재관을 갖고 있었기에 세아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인성이 바르지 않으면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 말만 앞세우고 성실한 노력을 하지 않거나 머리는 좋아도 진정성이 결여된 직원은 스스로 도태되었다.   

이운형의 오페라 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오페라를 좋아하고 사랑하기를 바랐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표를 구매해 세아 임직원을 비롯해 가계 지인들을 초청했다. 

오페라는 보통 한 작품을 4~5일 정도 공연하는데 거의 매회 공연마다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2000년 1월 1일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후부터였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오페라 활성화에 온 힘을 바쳤기에 국립오페라 단원들은 그가 타계했을 때 관계자 한 사람을 떠나보냈다는 애도 이상의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고 한다.

그가 타계한 2013년 3월 국립오페라단은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를 공연했는데, 공연에 앞서 영국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9번 ‘님로드’를 연주했다. 이 곡은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장례 추모에서 사용됐던 곡으로 이날 이운형 회장을 추모해 연주하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 영면에 들어가다


2013년 3월 13일부터 이운형 회장의 빈소에는 5일장 기간 내내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끊이지 않았다. 정재계를 비롯해 정치·법조·문화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장례 기간 상주로 빈소를 지키던 장남 이태성은 수많은 조문객 중 뜻밖의 사람들을 맞이했다. 지방의 공장 근처에서 식당을 하는 아주머니, 오래 전 퇴사한 경비원 등 아버지와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참 좋은 분이셨다.”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라고 그들은 한두 마디 짧게 고인을 추억하고는 혹여 폐가 될까 식사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아버지의 인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태성이지만 그런 조문객을 맞을 때면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온기가 남아 있다는 것에, 그런 아버지를 잊지 않아준 것에 다른 어느 조문객을 맞을 때보다 눈시울이 뜨거웠다고 한다. 

3월 16일 장례식이 끝난 후 운구행렬을 따라 세아에 왔던 어느 오랜 지인은 청소부 아주머니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보면서 새삼 탄식했다고 한다. 어느 회사에서 회장이 돌아가셨다고 청소부가 울겠냐며 이운형 회장의 마음이 가닿지 않는 곳이 없음을 깊이 느꼈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그렇게 깊은 영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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