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후판으로 시작된 철강 우회 통로
HS코드 7210.70, 실체 없는 명칭이 낳은 회색지대
반덤핑 전야, 컬러·환봉 ‘우회 통로’ 모색 본격화
컬러강판이 후판으로, 환봉이 철근으로 변신하고 있다. HS코드의 빈틈을 노린 ‘코드 왜곡’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통관 현장에서 철강 품목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탄소강 후판이 ‘컬러후판’으로 둔갑한 사례를 기점으로, 실체조차 불분명한 명칭이 시장 왜곡의 문을 열었다. 관세 회피를 넘어, 반덤핑을 앞둔 우회 통관의 새로운 경로가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냉연 모재 컬러강판이 후판 코드(7210.70)로, 특수강봉강이 철근 코드로 신고되는 사례가 잇따르며, 업계는 이를 반덤핑 조사를 앞둔 사전 포석으로 본다. 컬러강판과 특수강봉강은 아직 반덤핑 조사 개시 전 단계지만, 시장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컬러후판’은 지금 철강 통관 체계의 왜곡 거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냉연·도금재·도장강판 등 서로 다른 품목이 한 코드 아래로 흡수되면서, 실질적 구분선이 무너진 채 통관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 “세상에 컬러후판은 없다”…실체 없는 코드가 낳은 왜곡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철강업계에서는 냉연강판을 모재로 한 컬러강판이 ‘컬러후판(HS 7210.70)’ 코드로 통관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두께 0.3~0.5mm 수준의 박판 제품이 후판(6mm 이상)으로 분류되면서, 본격적인 반덤핑 조사 이전 ‘우회 수출 통로’를 미리 탐색하는 단계로 해석된다.
업계에서는 “당장 관세 회피 목적이라기보다 향후 규제 강화에 대비한 사전 포석”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철강금속신문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9월 한 달 동안 HS코드 7210.70으로 신고된 중국산 제품은 약 1,100톤에 달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JIS G3312(CGCC) 등 도장용융아연도금강판, 즉 컬러강판 규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후판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제품들이다.
산업적·기술적으로 ‘컬러후판’이라는 제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유통 현장이나 행정 실무에서 ‘컬러후판’이라는 표현이 쓰이지만, 이는 실체가 아닌 표기상의 편의나 혼동으로 만들어진 이름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대표적 국제 강판 표준인 JIS G3312(CGCC) 는 냉연강판을 모재로 한 컬러강판만을 규정하며, 후판을 기반으로 한 도장 제품은 어떠한 표준에서도 인정되지 않는다. 즉, ‘컬러후판’은 시장과 기술 기준상 존재하지 않는 ‘실체 없는 명칭’이다.
일례로 ‘컬러후판’으로 통용되는 HS코드 7210.70(도장된 철·비합금강 평판압연제품)은 냉연강판을 모재로 표면에 아연도금·도장을 입힌 컬러강판류(Color coated steel sheet) 를 포함하는 항목이다.
후판류의 공식 분류는 HS 7208 또는 7211 계열로, 7210.70은 본래 후판이 아닌 박판 제품군에 해당한다.
이에 컬러후판은 코드상 존재하더라도 명칭과 실제 제품군이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 사례다. 업계 관계자는 “실존하지 않는 명칭이 제도상 코드로 남으면서 각종 제품이 그 틈으로 들어온다”라며 “HS코드가 사실상 ‘실험대’로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대형 철강기업 수출 관계자도 본지와 통화에서 “한국 고객사의 요청으로 간단한 전처리 과정을 거친 이른바 ‘컬러후판’을 수출하고 있으나, 실제 컬러후판이 갖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라며 “현실보다 용어가 먼저 만들어진, 제도상의 산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세관은 여전히 ‘신고 중심’…현장 검증은 뒷전
현재 통관 구조는 신고 중심 체계로 운영된다. 수입업체가 제출한 HS코드와 서류상 규격이 일치하면, 실물 검증 없이 통관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수입업체가 유리한 코드를 선택적으로 적용하더라도 즉각적인 제재가 어렵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두께나 강종을 직접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냉연이 후판이 되고 도금재가 컬러후판이 되는 일이 반복된다”라며 “현장 실물 검증 없이 서류만 믿는 구조가 허점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컬러후판 코드는 사실상 컬러강판의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하다”라며 “관련 기관과 부처들이 HS코드의 실체를 제품 기준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특수강봉강도 ‘철근화’ 시도…새로운 우회 루트로 확산 조짐
이 같은 흐름은 후판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특수강봉강(환봉)을 철근 코드(HS 7214.20 등) 로 신고하는 사례가 일부 포착되며, 또 다른 ‘간 보기 통로’로 부상하고 있다.
세아베스틸과 세아창원특수강 등 국내 특수강업계가 지난 8월 중국산 봉강류에 대해 반덤핑 제소를 제기한 이후 나타난 변화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 수입업체들이 중국산 기계구조용 탄소강봉을 철근으로 신고해 통관하는 방식을 시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봉 등 중국산 특수강봉강은 아직 반덤핑 조사개시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반덤핑 조치가 본격화하면 이런 우회 루트가 빠르게 확산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환봉과 철근은 외형과 용도에서 명확히 구분된다. 환봉은 정밀가공용으로 표면이 매끄럽고 치수 오차가 작다. 철근은 콘크리트 보강용으로 표면에 마디가 있어 육안으로도 식별 가능하다.
다만 세관이 행정 절차상 서류 중심으로만 검수할 경우, 이 차이가 통관 단계에서 반영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철강을 조금이라도 알면 두 제품을 육안으로도 구별할 수 있으나, 전문 인력이 아닌 일반 행정 절차에서는 강종 분석이 생략된다”라며 “일부 수입업체가 이를 이용해 HS코드를 철근으로 신고하고 실제 환봉을 들여오는 사례가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 HS코드 왜곡, 통계와 정책 신뢰도까지 흔든다
HS코드의 불일치는 단순한 행정 착오를 넘어, 국가 통계와 반덤핑 조사 신뢰도를 흔드는 구조적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반덤핑 조사에서 수입실적은 코드 기준으로 집계되기 때문에, 코드와 실물이 어긋나면 덤핑률 산정의 정확성 자체가 흔들린다.
업계 관계자는 “코드 왜곡이 통계까지 흔들면 정책 신뢰도 자체가 무너진다”라며 “산업부·관세청·국표원이 공조해 실물 검증 기반의 데이터 연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는 반덤핑 등 무역구제와 함께 HS코드 구조 개편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컬러후판’처럼 존재하지 않는 명칭은 삭제하고, 두께·용도 중심의 분류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덤핑 관세만으로는 편법을 막을 수 없다”며 “HS코드와 실물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반덤핑 효과도 반쪽짜리에 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