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위에 은퇴한 친구들이 많다. 한창 일할 나이인 데 실업자로 전락한 모습은 보기가 좋지 않다.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은퇴를 위해 노후를 잘 준비한 친구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다. 두 부류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필자도 곧 두 부류 중 한 곳에 속하기 때문이다. 노후를 잘 준비한 사람은 퇴직이 두렵지 않다. 아름다운 제2의 인생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퇴직이 원치 않은 제2의 인생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고통스러운 삶과 만날 수 있다.
유명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떠오른다. 특히 주인공 윌리 로먼이 감정이입 된다. 36년간 길바닥을 누빈 62세의 주인공은 땀의 대가를 굳게 믿었다. 평생을 정직하게 일한다면 그만큼 보상도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통설(通說)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한때 총명했던 두 아들까지 타락하자 희망을 잃는다. 그래서 그는 차를 과속으로 몰아 생을 마감한다. 가족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선택한 비극이었다. 마지막까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퇴물 취급을 받는다면 누구든 섭섭할 것이다. 피땀 흘려 할부금을 부은 자동차·냉장고는 할부가 끝날 때쯤 고물이 되어 있다. 한 번만 돈을 더 내면 주택융자가 끝나는 집은 낡을 대로 낡았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장 나기 전에 내 것을 가져봤으면 좋겠다.”라는 그의 자조 섞인 말은 빈 껍데기뿐인 자신의 인생을 의미한다. 극의 마지막 장례식에서 그의 아내는 ‘할부금 납입이 막 끝났는데 이제는 이 집에 살 사람이 없다’고 울부짖는다. 아서 밀러(Arthur A. Miller)가 쓴 이 작품은 2년간 장기 공연은 물론 세 차례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29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수많은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이 연극을 통해 우리 현실을 직시한다. 지금 우리 처지는 이 연극보다도 낫다고 할 수 없다. 62세 이전에 직장을 잃는 사람이 많다. 내 집 마련이 부러운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한국에는 지금 수많은 로먼들이 고뇌와 번민과 싸우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내 집 마련의 꿈은 꿈만 꿀뿐이다. 현실과 괴리가 너무 크다. 직장은 명예퇴직을 권장하는 문화가 조성되어 있다. 회사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꺼내드는 카드이다. 실제로 이것을 못 견뎌 생을 마감하는 직장인이 있을 정도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일반화된 직장 행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명예퇴직이라는 미명 아래 옷을 벗는 직장인이 있다. 실적이 나쁜 우리 업체도 명예퇴직 소문이 무성하다. 또 다른 로먼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퇴직은 명예로워야 한다. 마지못해 등 떼밀려 하는 퇴직은 명예로울 수 없다. 특히 경영이 나빠진 책임을 경영자가 지지 않고 직원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비겁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우리 기업 대다수가 이러한 행태에 익숙해 있다.
‘사오정‘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를 받던 시절 대기업과 은행이 구조조정 명분으로 수많은 직원을 해고했다. 주로 나이 많은 직원들이 직장을 잃었다. 이 때문에 45세가 되면 정년이라는 외환위기 때 나온 말이 사오정이다. 그런데 요즘 ‘신(新) 사오정’이라는 말이 새롭게 생겼다. 회사 허리인 40∼50세에 중장년 직장인에 대한 ‘권고사직’ 바람이 거세다고 한다. 이름을 대면 다 아는 우리 업체도 포함된다. 2023년 기준 직장 퇴직 평균 연령이 50.5세라고 한다. 이처럼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직하는 직장인이 많다.
문제는 신사오정의 퇴직 충격은 전 연령대서 가장 크다는 점이다. 60대에 정년퇴직하면 그나마 이뤄 놓은 것이 있기에 충격이 적다. 하지만 40∼50세는 한창 일할 때이다. 부양할 가족이 있고, 집 마련과 자녀 교육비 등 나갈 돈이 많다. 재취업도 쉽지 않다. 취업을 했다 해도 임금이 전 직장의 60%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신사오정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절박한 상황을 보면 차라리 세일즈맨 로먼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루어 놓은 것과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을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이유는 보편성에 있다. 주인공인 로먼의 소시민적 삶과 행복, 좌절은 1940년대 후반 미국 소시민을 넘어 전 세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지구촌의 공감을 얻었다. 이 극에서 제시한 물음은 ‘열심히 살았다면 최소한의 보장은 필요하지 않느냐’이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지 못하다. 열심히 산 것만으로 부족하다. 그 외(?)의 것을 찾아 열심히 노력해야 성공한 직장인이 될 수 있다. 그 외가 무엇인지는 성공한 직장인들은 다 안다. 아름다운 퇴직을 위해서는 특히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